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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안드로마케,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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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피데스의 <안드로마케>/BC431~BC404년 사이에 초연됐을 것으로 추정

 

올해 노벨 평화상은 세 명의 여성이 공동수상했다. 민주화 운동의 공적으로 엘렌 존슨 설리프 라이베리아 대통령과 예멘의 인권운동가 타와클 카르만이 수상했고 또 한 명의 수상자인 라이베리아의 레이마 보위는 '여성 평화와 안전 네트워크 아프리카(Women Peace and Security Network Africa)'에서 이사직을 맡으며 여성의 사회참여를 위한 활동이 인정되었다고 한다. 특히 노벨위원회의 이들 세 여성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유로 오늘날 여성은 전쟁과 갈등 속에서 폭력과 강간 등에 가장 고통받고 있는 존재로 최근 민주화 운동이 한창인 아랍의 봄 역시 이와 같은 주제로 시작되었으며 여성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얻을 수 없다고 밝혔다.

여전히 여성의 차별과 사회참여를 위한 활동들이 노벨 평화상의 수상 이유라는 점은 씁쓸한 대목이다. 국내로 잠시 눈을 돌려보면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의 선거공약으로 신설된 여성가족부는 차별적 존재로서의 여성의 현실에 대한 역설처럼 보인다. 그만큼 존폐를 둘러싼 성대결이 치열한 부처이기도 하다. 최근에야 여성의 사회참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이 높은 것도 현실이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중 한 명인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안드로마케>를 통해 수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여성 차별의 근본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과연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에우리피데스의 <안드로마케>는 그가 남긴 다수의 비극 중에서도 가장 통일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극 전개가 상당히 혼란스럽다는 얘기일 것이다. 우선 이야기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네오프톨레모스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 인물도 안드로마케에서 헤르미오네와 오레스테스에서 마지막에는 펠레우스까지 전혀 통일성이 없다. 

<안드로마케>의 비극은 역시 트로이 전쟁에서 비롯된다. 트로이의 장군 헥토르의 아내였던 안드로마케는 패전의 슬픔을 뒤로 한 채 전쟁 전리품으로 승자인 그리스 연합군 아켈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의 몸종이자 아내가 된다. 비극의 시작은 비록 전쟁이었지만 안드로마케에게는 또 다른 비극이 있다. 바로 여자라는 것이다. 먼저 안드로마케의 운명은 자신의 의지보다는 한 남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유세가의 말을 기록한 <전국책>에 나오는 '선비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나를 알아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안드로마케의 비극은 남편인 네오프톨레모스가 헤르미오네와 결혼하면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네오프톨레모스는 비극의 제공자임에도 불구하고 극 중에서 완전히 빠져있다. 오로지 남자의 선택에 의해 두 여자의 대립만 존재할 뿐이다. 한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처절한 전장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안드로마케 내가 매혹시켜서 당신 남편이 당신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오. 그건 당신 자신이 남편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사랑은 다만 매력에서 오는 것이죠. 우리 여성이 남편의 사랑을 얻는 것은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덕행이라오. 조심해요. 여자란 남편이 아무리 무능해도 만족해야만 하는 법. 건방진 소리를 해서도 안돼. -<안드로마케> 중에서-

안드로마케의 가해자이자 악녀로 등장한 헤르미오네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안드로마케의 시할아버지인 펠레우스의 등장으로 그녀를 죽이고자 했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헤르미오네는 남편의 처벌이 두려워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서로 대립된 두 여자이지만 결국 이들의 운명은 남편이 네오프톨레모스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가부장적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안드로마케 비극의 또 다른 원인은 바로 모성애다. 모성애는 그녀로 하여금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든다. 헤르미오네와 메넬라오스의 협박으로부터 그녀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헤르미오네와 메넬라오스는 아들을 볼모로 안드로마케가 네오프톨레모스를 떠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협박은 협박일 뿐 이 모자의 운명은 각각 헤르미오네와 메넬라오스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게 된다.  

안드로마케 내가 당하는 이 모든 고통은 고사하고 내 아들이 안전하기만 하다면 하는 소망을 가질 뿐 어떠한 슬픔도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을 갖습니다. -<안드로마케> 중에서-

지나친 확대해석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본능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여성의 전유물처럼 왜곡하는 당시 사회의 인식이다. 안드로마케가 네오프톨레모스에게 분노하는 것도 육아의 책임을 그녀에게만 떠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모성애는 모든 인간의 본능이지 여성만의 미덕은 아니지 않은가. 2500년 전 안드로마케가 아니 대부분의 여성은 오로지 남성의 사랑과 자식에 대한 사랑을 강요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성의 존재 이유를 여기에 국한시키는 포비아적 시각은 여전히 존재한다. 혹시 페미니스트? 나를 낳아준 위대한 어머니도 역시 여자라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구시대적인 가부장적 사회의 해체와 국가와 사회의 육아에 대한 공동분담은 또 하나의 경쟁력이지 않을까.

다행히도 <안드로마케>는 다른 비극과 달리 극 전개과정에서는 비극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만 결론에서는 테티스의 등장으로 안드로마케는 전남편인 헥토르의 동생 헬레노스의 아내로 보내지고 아들인 몰로소스는 아이아코스가의 후손으로 인정받게 된다. 서로 다른 집안으로 보내지니 이 또한 비극이라면 비극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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