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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천방지축 애인 요조숙녀 만들기의 불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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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The Taming of the Shrew)/1591년

짚신도 짝이 있다, 제눈에 안경, 시루에 물은 채울망정 사랑은 못 채운다, 안보면 보고 싶고 보면 이가 갈린다, 눈에 콩깍지가 씌였다.…사랑은 변화무쌍하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사랑에는 의외성이 존재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자애라고 하고 친구끼리의 사랑을 우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랑도 남녀간의 사랑처럼 변화무쌍하고 의외성있는 그것은 없다. 나쁜 남자에게 열광하기도 하고, 왈가닥 그녀에게 마음을 뺏기기도 한다. 만인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미인도 누군가에게는 별 매력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여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 사랑은 사람을 바꾸기도 한다. 사랑을 얻기 위해 상대에게 나를 맞추기도 하고 나를 사랑하는 상대가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눈높이를 조절하기도 한다. 때로는 거짓 사랑이 진실한 그것이 되기도 하고 목숨과도 같았던 사랑이 한때의 불장난이 되기도 한다. 알 수 없는 게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자행되기도 하고 폭력을 위장하기 위해 사랑이 동원되기도 한다. 급기야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폭력을 참아내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발생한다.

여기 아버지를 잃고 정처없이 세상을 떠돌면서 뜬구름같은 행운을 잡으려는 한 사내가 있다. 이 사내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여자와 부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사내의 그녀는 여간 만만찮다. 천방지축 말광량이다. 세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도저히 여성적 매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패듀어의 갑부인 밥티스타의 딸 카타리나를 통해 부와 여자를 동시에 얻으려는 페트루치오가 천방지축 카타리나를 요조숙녀로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어떻게 사랑했으며 과연 이들의 행각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16세기 유럽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는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현대적 시각으로 본다면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반여성적이다. 여성에게는 사랑이나 결혼에 관한 어떤 선택권도 없다. 그저 부모와 상대 남자의 결정에 의해 선택된 운명만을 살아가야 한다. 철저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고가 극 전반에 깔려 있다. 특히 말광량이 카타리나를 길들이는 과정은 요즘으로 치면 범죄에 가깝다. 

페트루치오 따님은 성미가 못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름 새벽같이 상쾌하답니다. 게다가 참을성 많기로는 데카메론에 나오는 양처 그리셀다에 못지 않고, 정조 관념은 저 로마의 열녀 루크레치아에 버금가지요. 그래서 결국 저희 두 사람은 다음 일요일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합의를 봤습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 중에서-

페트루치오의 반어적인 이 대사는 페트루치오가 연인 카타리나를 길들여 바뀌는 순종적 여성상이자 당시 사회의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그러나 천방지축 애인을 요조숙녀로 만드는 페트루치오의 '말광량이 길들이기'는 언어 폭력과 생리적 학대로 그려진다. 타인에 대한 욕설과 학대로 카타리나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게 만들고, 카나리나를 허기지게 만든 다음 음식을 조절하는 식으로 그녀를 길들이는 식이다. 오히려 카타리나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동생 비앙카는 아버지의 선택과 다른 결혼을 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다. 진정한 러브 스토리는 조연들의 몫이 아니었나싶다.

세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다른 그의 작품에 비해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내용 탓에 무대에 자주 올려지면서 세익스피어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반면 반여성적이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극의 전개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작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년, 영국)로부터 '역겨운 희극'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한편 널리 알려져 있는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액자 구성 문학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에피소드라는 사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서극과 본극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서극의 끝 부분에 나타나는 연극의 내용인 것이다. 극 중 극이라고 하면 더 쉽게 이해될 것이다.

서극은 영주가 술에 취해 제 멋대로 행동하는 주정뱅이 슬라이를 상대로 가짜 영주놀이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주의 철저한 각본으로 술에서 깨어난 슬라이는 자신을 영주로 대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처음에는 낯설고 황당한 반응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슬라이는 자신이 진짜 영주로 착각하고 영주 신분에 맞는 근엄한 행동을 하게 된다. 원래 영주의 각본대로 슬라이는 <말괄량이 길들이기>라는 연극을 보게 된다.

서극과 본극을 연결해 보면 세익스피어는 사회적인 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통해 자신의 처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에 따라 자신의 진정한 내면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한편 지나치게 순종적 여성으로 변신한 카타리나가 왠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것은 가장된 순종을 통해 페트루치오를 지배하려는 카타리나의 의도적인 연기였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상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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