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진(巴金, 1904~2005)의 장편소설 《차가운 밤》
바진(巴金, 1904~2005)은 루신, 라오서와 함께 중국의 3대 문호로 꼽힌다. 그는 무려 한 세기를 꽉 채우고도 남은 인생을 살았다. 프랑수와 미테랑 프랑스 전대통령의 “두 세기에 걸쳐 시련으로 단련하면서 끊임없이 스스로 부활의 원동력을 만들어낸 바진의 삶은 중국 그 자체이다.”라는 말처럼 바진은 중국의 근대와 현대를 관통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이 겪었던 질곡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았다. 중국이 자랑하는 문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이 낯선 이유가 그의 기나긴 삶 때문이라는 조금은 아이러니한 생각을 해본다. 《가》에 이어 만난 《차가운 밤》은 고전 작가로서의 바진을 더 이상 낯선 이름으로 기억해야만 하는 수고로움을 덜어주기에 충분할 만큼 잔잔한 감동과 더불어 결코 멀지 않은 역사적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바진을 대표하는 단어를 꼽으라면 단연 휴머니즘과 아나키즘일 것이다. 그는 작가나 문학이 정치나 투쟁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되며 문학은 어디까지나 사랑과 정열을 불사르고 자아의 심성을 고양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이런 휴머니즘에 대한 믿음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 기간에 반혁명분자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 그는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미국의 여류작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골드만의 《무정부주의》를 읽고서 자신의 모호한 시야를 맑게 해주었고 명확한 신앙을 갖게 해 주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물론 1950년대 후반 무정부주의적 사고를 포기하기는 했지만 휴머니스트와 아니키스트로서의 그가 추구했던 목표는 늘 사람이고 사랑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1946년 집필한 소설 《차가운 밤》에서도 바진은 사람과 사랑을 보는 따뜻한 시선을 탁월한 성격 묘사를 통해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갈등
바진이 소설 《가》에서 그렸던 봉건가정은 《차가운 밤》에 이르러 근대 가정으로 발전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봉건적 사고는 갈등의 원인이 된다. 특히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은 동서고금의 진리인 듯 주인공의 갈등이 정신적 고통에서 육체적 고통으로 발전해 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신세대 여성인 아내와 신교육을 받았지만 여전히 봉건적 예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어머니, 주인공 왕원시안에게는 누구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어머니가 ‘그년’이라고 말을 할 때, 그는 고통스러워서 눈썹을 찌푸리고 한편으로는 아내의 손을 꽉 잡았다. 그는 아내가 어머니와 다툴까 두려웠다. 그러나 아내는 시종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어머니!”하고 소리를 질렀다.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비통한 음성이었다. -《차가운 밤》 중에서-
어머니에게 전족(중국에서 여성을 발을 어릴 때부터 묶어 자라지 못하게 하는 풍습)은 부끄러움이었지만 한편 며느리에 대한 권위의 상징이었다. 어머니가 벗어버리지 못하는 봉건적 구습은 폐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의 치료에 대한 믿음에서도 나타난다. 양약 즉 신식 의료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난다. 이는 곧 아들의 병을 더욱 키우는 꼴이 되고 만다. 결국 신구 세대간 갈등으로 주인공 왕원시안은 죽음의 순간을 향해 끊임없이 추락해만 간다.
사랑
아내에게 늘 미안해 하는 남편, 사랑하지만 이런 남편이 싫은 아내. 남편 왕원시안과 아내 수성을 표현하면 이 정도면 적절하지 싶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남편. 그러나 아내 수성은 신여성이다. 누구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와의 갈등만 빼면 누구보다 남편을 사랑한다.
결국 아내는 가출한다. 아내가 다니던 은행의 인사발령이 그 이유였지만 그녀에게는 일탈이 필요했다. 왕원시안은 결국 이별의 아픔으로 폐병을 얻게 되고 가족의 생계는 오로지 아내 수성의 몫이 되었다. 여전히 어머니는 수성을 못마땅해 하고 며느리의 인사발령조차도 불륜의 결과로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왕원시안은 둘의 갈등을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떤 해결책도 찾지를 못한다. 결국 이어진 아내의 이혼 통보.
우리가 함께 사는 것은 서로를 망치고 서로에게 손해일 뿐이에요. 그리고 당신 어머니가우리 사이에 있는 한, 평화와 행복은 우리 것이 될 수 없어요. 우리는 결국 헤어질 운명이었던 거예요.” -《차가운 밤》 중에서-
남편은 늘 우유부단했고 이제는 나약해졌다. 죽음 앞에서 아내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은 아내를 놓아주는 것 뿐이었다.
편지는 받았소. 몇 차례 읽었지만, 당신에게는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구려. 당신의 청춘을 망친 것이 나의 큰 잘못이오. 이제 방법이 생각났소. 늦었지만 이제라도 당신에게 자유를 돌려주려 하오. 당신 말이 모두 옳소. 모두 당신 뜻대로 하시오. 그저 날 용서하구려. -《차가운 밤》 중에서-
전쟁
《차가운 밤》은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본의 중국 침략과 이들 주인공 부부에게 다가오는 전쟁의 공포. 전쟁은 가족의 생계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이들 부부가 이별 아닌 이별을 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어진 이혼 통보와 왕원시안의 쓸쓸한 죽음.
바진은 전쟁의 비열함과 인간성 파멸의 참혹한 현장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이 임박해 오면서 깊어지는 갈등과 사랑을 탁월한 심리 묘사로 표현하고 있다. 전쟁은 이들 부부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전쟁경계경보로 쓸쓸해진 차가운 밤거리에서 왕원시안은 나약해진 자신을 보게 되고 결국 그들은 파멸의 길을 걷는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그저 창밖에서 "설탕과자"라고 외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극히 처량하고 적막하고 쇠약한 목소리였다. 그는 마치 자기의 그림자를 보는 것 같았다. 고개를 움츠리고 양손은 소매에 넣고서 차가운 바람도 막지 못하는 때에 찌든 낡은 외투를 걸치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외롭게 외치고 다니는 병약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다시 이불 속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차가운 밤》 중에서-
작가는 스피커가 아니라고 외쳤던 바진. 그는 작가로서, 지식인으로서의 역할과 고민을 작품을 통해 실천했다. 바진이 변혁의 시대를 거치면서 자신의 사상적 신념도 변화를 겪었으나 한가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만은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차가운 밤》에서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존재하는 직접적인 갈등만 서술할 뿐 이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전쟁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도 휴머니스트 바진의 진면목이 아닐까 싶다.
*집은 책으로 채우고 화원은 꽃으로 메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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