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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이 사실은 공동체 살인의 희생양이었단다. 고전 속 심청은 분명 아버지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나 소설 속 도화동 사람들은 눈먼 아비를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는 폭력적 이데올로기를 숭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 훈육의 결과로 심청이 스스로 희생하였으니 '이념 공동체의 심청 살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념 공동체의 심청 살해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심청이 죽기 전 남긴 대사 어디에도 자신이 죽음으로써 아버지가 눈을 뜬다는 확신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희생이 결국은 아비를 죽게 하고 말 것이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이것은 계약위반이다. 공양미 삼백 석을 부처님께 바치면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다고 했잖은가?
또 이 계약으로 자신의 죽음을 천명으로 받아들인 심청이 뱃사람들에게 끌려갈 때 동네 사람들은 심청을 울며 전송할 뿐 만류하지 않는다. 백미 삼백 석을 대신 내어주겠다던 장 승상댁 부인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아비를 위해 딸은 죽을 수 있다는 하나의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더 많은 심청 살해 사건의 내막이 존재한다.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 죽지 않고 황후가 되었다고? 이것은 살인과 죽음에 대한 보상일 뿐이며 살인의 실체를 은폐하려는 서사적 장치에 불과하다. '심청 살해 사건'의 진상을 알기 전 우리는 '효'라는 가치로 이 부당하고 부도덕한 거래를 덮고 있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놓은 효녀 심청의 죽음을 이념 공동체에 의한 타살이라는 뜻밖의 해석을 내놓은 사람은 다름아닌 대학시절부터 처연한 한국 고전소설에 심취해 현재도 연구자로 살고 있는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정원 교수다. 이정원 교수는 그의 저서 [전을 범하다]를 통해 박제된 고전 해석에 하이킥을 날리고 있다.
그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고전소설의 주제 '권선징악'을 '참 편리한 지식'으로 비판한다. 고전소설에 대한 이렇게 박제된 해석으로 당면한 여러 현실적인 모순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전소설이 외면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학교 교육이 고전소설의 모든 주제를 '권선징악'으로 한정시켜버린 데는 불편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불편한 진실이라 함은 고전소설에는 예리한 현실 비판의 칼날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영웅소설 <홍길동전>을 보자. 우리는 <홍길동전>을 최초의 국문소설이 가지는 의의만 주입받고 관련 지식만을 외우는 데 급급했다. 서자 출신으로 호부호형을 못하는 홍길동의 고뇌는 국가적 또는 사회적 차원의 논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사건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홍길동의 권선징악이 바탕이 된 영웅적 행동은 율도국 건설로 결말을 맺지만 그는 다시 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벼슬을 구걸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부인이 여럿 있었고 그 자식들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화려한 결말과 달리 홍길동을 서럽게 했던 사회제도는 그대로 남겨 놓았다. 도대체 홍길동이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저자의 해석은 호부호형, 그 너머에 존재하는 고전소설이 주는 의미를 찾고자 한다.
<토끼전>도 마찬가지다. 발랄한 재치로 위기를 넘긴 토끼의 활약상은 오히려 아이들을 위한 동화로 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박제된 해석을 거부하고 불편한 진실을 발견한다. 국가권력의 횡포다. 용왕은 너무도 당당히 토끼의 간을 요구한다. 왜? 내가 용왕이니까. 그 외 다른 명분은 없다. 저자의 <토끼전> 해석은 우리사회의 천박한 발전논리가 선진국의 이름으로 등장하고 일류국가의 명분으로 등장한다는 해석에까지 이른다. 이렇게 천편일률적인 교과서적 해석을 거부한 저자에게 <전우치전>은 퍽 매력적인 고전소설로 인식된 듯 하다. <전우치전>을 아무리 뒤져봐도 권선징악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으니 말이다. 진부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만으로도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그러고보니 <전우치전>은 학교 교육에서 그렇게 언급되지 않았던 것 같다.
[전을 범하다]에는 총 13편의 우리 고전소설들이 소개되어 있다. 또한 각각의 고전소설들에는 기존 틀을 거부한 저자만의 독특한 해석이 곁들여진다. 교과서 너머, 고전소설 너머의 뭔가를 찾으려는 저자의 해석을 보면서 그가 대학시절부터 심취해 있었다는 고전소설에 대한 풍부한 독서와 연구의 고뇌가 느껴지는 책이기도 하다.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벌한다는 그저그런 지식으로 선뜻 읽어보는 수고를 아끼려했던 마음에 돌멩이 하나를 맞은 듯 작은 파장이 느껴진다. 작가가 어떤 의도로 글을 썼던간에 해석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권선징악'이라는 참 편리한 지식으로 박제품이 되어버린 고전소설에 생명을 불어넣어보자.
장화와 홍련의 살해 혐의를 받고 있는 계모는 무조건 벌해야 할 '악'일까?
'이념 공동체의 심청 살해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심청이 죽기 전 남긴 대사 어디에도 자신이 죽음으로써 아버지가 눈을 뜬다는 확신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희생이 결국은 아비를 죽게 하고 말 것이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이것은 계약위반이다. 공양미 삼백 석을 부처님께 바치면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다고 했잖은가?
또 이 계약으로 자신의 죽음을 천명으로 받아들인 심청이 뱃사람들에게 끌려갈 때 동네 사람들은 심청을 울며 전송할 뿐 만류하지 않는다. 백미 삼백 석을 대신 내어주겠다던 장 승상댁 부인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아비를 위해 딸은 죽을 수 있다는 하나의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더 많은 심청 살해 사건의 내막이 존재한다.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 죽지 않고 황후가 되었다고? 이것은 살인과 죽음에 대한 보상일 뿐이며 살인의 실체를 은폐하려는 서사적 장치에 불과하다. '심청 살해 사건'의 진상을 알기 전 우리는 '효'라는 가치로 이 부당하고 부도덕한 거래를 덮고 있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놓은 효녀 심청의 죽음을 이념 공동체에 의한 타살이라는 뜻밖의 해석을 내놓은 사람은 다름아닌 대학시절부터 처연한 한국 고전소설에 심취해 현재도 연구자로 살고 있는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정원 교수다. 이정원 교수는 그의 저서 [전을 범하다]를 통해 박제된 고전 해석에 하이킥을 날리고 있다.
그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고전소설의 주제 '권선징악'을 '참 편리한 지식'으로 비판한다. 고전소설에 대한 이렇게 박제된 해석으로 당면한 여러 현실적인 모순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전소설이 외면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학교 교육이 고전소설의 모든 주제를 '권선징악'으로 한정시켜버린 데는 불편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불편한 진실이라 함은 고전소설에는 예리한 현실 비판의 칼날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영웅소설 <홍길동전>을 보자. 우리는 <홍길동전>을 최초의 국문소설이 가지는 의의만 주입받고 관련 지식만을 외우는 데 급급했다. 서자 출신으로 호부호형을 못하는 홍길동의 고뇌는 국가적 또는 사회적 차원의 논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사건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홍길동의 권선징악이 바탕이 된 영웅적 행동은 율도국 건설로 결말을 맺지만 그는 다시 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벼슬을 구걸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부인이 여럿 있었고 그 자식들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화려한 결말과 달리 홍길동을 서럽게 했던 사회제도는 그대로 남겨 놓았다. 도대체 홍길동이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저자의 해석은 호부호형, 그 너머에 존재하는 고전소설이 주는 의미를 찾고자 한다.
<토끼전>도 마찬가지다. 발랄한 재치로 위기를 넘긴 토끼의 활약상은 오히려 아이들을 위한 동화로 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박제된 해석을 거부하고 불편한 진실을 발견한다. 국가권력의 횡포다. 용왕은 너무도 당당히 토끼의 간을 요구한다. 왜? 내가 용왕이니까. 그 외 다른 명분은 없다. 저자의 <토끼전> 해석은 우리사회의 천박한 발전논리가 선진국의 이름으로 등장하고 일류국가의 명분으로 등장한다는 해석에까지 이른다. 이렇게 천편일률적인 교과서적 해석을 거부한 저자에게 <전우치전>은 퍽 매력적인 고전소설로 인식된 듯 하다. <전우치전>을 아무리 뒤져봐도 권선징악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으니 말이다. 진부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만으로도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그러고보니 <전우치전>은 학교 교육에서 그렇게 언급되지 않았던 것 같다.
[전을 범하다]에는 총 13편의 우리 고전소설들이 소개되어 있다. 또한 각각의 고전소설들에는 기존 틀을 거부한 저자만의 독특한 해석이 곁들여진다. 교과서 너머, 고전소설 너머의 뭔가를 찾으려는 저자의 해석을 보면서 그가 대학시절부터 심취해 있었다는 고전소설에 대한 풍부한 독서와 연구의 고뇌가 느껴지는 책이기도 하다.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벌한다는 그저그런 지식으로 선뜻 읽어보는 수고를 아끼려했던 마음에 돌멩이 하나를 맞은 듯 작은 파장이 느껴진다. 작가가 어떤 의도로 글을 썼던간에 해석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권선징악'이라는 참 편리한 지식으로 박제품이 되어버린 고전소설에 생명을 불어넣어보자.
장화와 홍련의 살해 혐의를 받고 있는 계모는 무조건 벌해야 할 '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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