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그리스 신화에서 ‘고르디아스의 매듭’은 미다스 왕(또는 고르디아스 왕)이 묶었다가 나중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the Great. 기원전 356년~기원전 323년)이 잘라 서아시아 점령 임박을 예고한 풀 수 없는 퍼즐이었다. 18세기 이탈리아 화가 페델 피셰티(Fedele Fischetti. 1732년~1792년)는 이 순간을 그림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오늘날 ‘고르디아스의 매듭’이라는 용어는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복잡한 문제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고르디아스의 매듭’ 이야기는 약 기원전 2천년 전 그리스 역사에 처음 등장한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일대기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수천 년 동안 회자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 용어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페델 피셰티의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는 알렉산더'

 

그리스 신화에서 고르디아스(Gordias)는 프리기아(아나톨리아 중앙부에 있었던 왕국)의 왕으로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움의 창시자이자 전설적인 고르디아스 매듭의 제작자이며 무엇이든 만지면 금으로 변하게 하는 미다스 왕의 아버지였다. 고르디아스와 미다스는 기원전 2천년경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르디움 건국 신화에서 고르디아스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가난한 농부로 고대 발칸 반도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 브리게스 왕가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어느 날 독수리가 소달구지에 내려앉았을 때 그는 그것을 자신이 언젠가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해석했다. 고르디아스가 소달구지를 몰고 나중에 갈라티아의 일부가 된 프리기아 지역의 더 동쪽에 위치한 오래된 숭배 중심지인 텔미소스에 있는 사바지오스(프리기아의 하늘의 신)의 신탁으로 가는 동안 소달구지에 앉은 독수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도시의 문 앞에서 그는 한 여성 예언자를 만났고 그녀는 사바지오스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조언했다.

 

한편 갑자기 왕이 없는 자신들을 발견한 프리기아인들은 신탁의 조언을 들었고 소달구지를 타고 신전에 처음으로 나타난 사람을 왕으로 칭송하라는 말을 들었다. 이 사람이 바로 농부 고르디아스였다. 고르디아스는 프리기아의 수도가 된 고르디움을 건설했다. 그의 소달구지는 아크로폴리스에 보존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건국 신화는 텔미소스를 계승한 고르디움을 프리기아의 컬트 중심지로 정당화했다. 소달구지의 멍에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이라는 이름으로 복잡하게 끈으로 고정되었다. 훗날 알렉산더 대왕 측근들은 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푼 자가 당시 아나톨리아와 동일시되던 서아시아의 주인의 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알렉산더 원정기>의 저자 아리안(Arrian of Nicomedia. 기원전 86년~기원전 160년. 그리스)에 따르면 당시 프리기아는 고르디아스의 아들 미다스가 왕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장 시몽 베르텔레미의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는 알렉산더'

 

일부 기록에서는 고르디아스와 프리기아 여신 키벨레가 미다스를 입양했다고 하며 또 다른 기록에서는 미다스가 그들의 아들이었다고도 한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 기원전 484년~기원전 425년)는 미다스가 고르디아스의 아들이라고 말하며 키벨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고르디아스의 아들 미다스는 마케도니아에 정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헤로도토스가 전설적인 프리기아에서 아나톨리아로의 이주 전에 고르디아스가 살아 있었다는 것을 믿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 다른 전설에서 고르디아스와 그의 아내는 아들 미다스를 낳았고 어느 날 그는 아버지의 마차를 운전하던 중 왕으로 선포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미다스 왕 또는 고르디아스 왕은 새로운 왕으로서 사바지오스(또는 제우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소달구지를 신전에 봉헌하고 멍에를 복잡한 매듭으로 묶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서아시아 전역을 지배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매듭을 풀기 위해 시도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등장한 이가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의 기원은 모호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이 이 매듭을 접한 것은 여러 그리스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333년은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 제국을 확장하기 위한 원정을 시작한 지 3년이 되는 해였다. 1세기경에 활동한 로마 역사가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Quintus Curtius Rufus)가 쓴 <알렉산더의 역사>에 따르면 어느 날 그의 군대가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움으로 진군하던 중 소달구지에 부착된 멍에를 발견했다. 이 멍에는 많은 끈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각각의 끈을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한편 고대 그리스 역사가 아리안은 <알렉산더 원정기>에서 이 끈은 코넬 나무껍질로 만들어졌으며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코넬 나무는 밀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스인들은 종종 이 나무를 무기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앙드레 카스테뉴의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는 알렉산더'

 

아리안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프리기아인들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서아시아의 통치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에 열정적인 갈망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그러나 풀 줄의 끝을 찾지 못하자 알렉산더는 끈들이 풀리는 방식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선언하고 칼을 뽑아 매듭을 잘라 버렸다. 매듭을 푼 알렉산더 대왕의 방법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상적인 방식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매듭을 푼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날 밤 큰 폭풍이 일어났고 알렉산더와 그의 부하들은 신들이 기뻐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물론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23년 32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서아시아의 넓은 지역을 정복했다. 하지만 정말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풀었기 때문이었을까?

 

알렉산더 대왕과 ‘고르디아스의 매듭’에 대한 고대 기록은 최소 5개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이를 둘러싼 이야기는 전하는 사람마다 다르며 대부분은 신화적인 특성이 가미되어 있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의 전설은 알렉산더 대왕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수세기에 걸쳐 퍼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용어는 현대 어휘의 일부가 되었다. 이에 한 몫을 한 이가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년~1616년. 영국의 극작가이자 시인)일 것이다.

 

반응형

 

셰익스피어의 1598년 희곡 <헨리 5세>의 오프닝 장면에서 캔터베리 대주교는 명목상의 왕이 복잡한 정치를 다루는 능력에 대해 ‘그를 어떻게든 정책의 대의명분으로 돌려세우면 그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풀 것이다’라고 말한다. 언어가 발전함에 따라 복잡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고르디아스의 매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다라는 표현은 복잡한 문제에 대한 예상치 못하게 손쉬운 해결책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르디아스의 매듭’이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전설은 독자적인 삶을 살아왔고 현대 언어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2024년을 한 단어로 관통해 버린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친위 쿠테타인 비상 계엄 선포가 벌써 해를 넘겨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정치 후진국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내란 수괴 윤석열은 경호처 직원들을 방패삼아 관저로 숨어들었고 극우 집단(?)은 내란을 옹호하며 윤석열을 지키겠다고 선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극우의 선동에 일부 보수층은 내란 수괴 지지로 돌아서고 있다. 언론은 또 다시 정쟁 프레임으로 내란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이런 정치적 혼돈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이 복잡한 매듭을 단칼에 잘라 버렸듯이 탄핵 정국의 해법은 간단하고 단순하다.내란 수괴 윤석열의 신속 체포와 헌법 재판소의 빠른 탄핵 인용 뿐이다. 생각처럼 속전속결이 아니더라도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역사는 조금 더딜지언정 끝내는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반응형
Posted by 여강여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