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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이집트

사나운 악어 신 소베크가 수호신이기도 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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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베크(Sobek. 또는 세베크)는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역사와 속성을 가진 고대 이집트의 신이었다. 그는 나일악어(아프리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악어로 길이가 6m에 달한다) 또는 서아프리카 악어와 관련이 있고 악어의 형상 또는 악어 머리를 가진 남성으로 표현된다. 소베크는 또한 파라오의 권력, 다산, 군사적 기량 등과도 연관되어 있었지만 나일강으로 상징되는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기원하는 액막이 특성을 지닌 보호 신이기도 했다. 소베크는 사트-세켐-네베트-타위 소베크네페루(Sat-Sekhem-Nebet-Tawy Sobekneferu. 기원전 18세기 중반 이집트 제12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라는 네브티 이름(Nebty name. 파라오가 갖게 되는 다섯 개의 이름 중 하나)을 사용한 최초의 여성 파라오가 경의를 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파라오의 이름은 소베크네페루였다.

 

전쟁의 신 소베크. 출처>구글 검색

 

소베크는 고대 이집트 판테온에서 이집트 고왕국 시대(기원전 2686년~기원전 2181년)부터 로마 시대(기원전 30년~기원후 641년)까지 오랫동안 이집트인들과 함께 해왔다. 그는 고대 왕국의 여러 피라미드 문헌 특히 주문을 통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주문은 파라오를 악어 신의 살아있는 화신으로 찬양하는 내용이다. 주문에 따르면 우니스는 머리를 치켜 올려 경계하고 있는 녹색 깃털을 지닌 소베크이며 햇빛 속에서 위대한 여신의 허벅지와 꼬리에서 나온 물보라를 치는 존재이다. 즉 주문은 이집트 고왕국 시대 제5왕조 파라오 우니스(또는 우나스)를 네이트 여신의 아들 소베크로 찬양하고 있다.

 

소베크는 고왕국에서 숭배를 받았지만 중왕국 시대(기원전 2055년~기원전 1650년) 특히 제12왕조 파라오 아메넴하트 3세 치하에서 명성을 얻었다. 아메넴하트 3세는 소베크와 밀접하게 관련된 지역인 페이윰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아메넴하트와 동시대 왕조의 많은 사람들이 소베크를 알리기 위한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 프로그램이 자주 실행된 곳이 바로 페이윰이었다. 이 시기에 소베크 역시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그는 종종 매의 머리를 한 신성한 왕권의 신인 호루스와 융합되었다. 이로 인해 소베크는 이집트 왕들과 더욱 가까워졌고 그로 인해 이집트 판테온에서 더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결합은 소베크 신의 본성에 더 미세한 수준의 복잡성을 더해줬다. 이 융합을 통해 소베크가 호루스와 그의 부모인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신성한 삼주신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소베크는 처음에 호루스와의 연결을 통해 태양신으로서의 역할을 얻었지만 이는 나중에 소베크와 이집트의 주요 태양신 라의 융합인 소베크-라의 출현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소베크-호루스는 신왕국 시대(기원전 1550년~기원전 1069년)에도 계속 등장했지만 소베크-라가 명성을 얻은 것은 이집트 마지막 왕조 때였다. 신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이집트의 마지막 토착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32년~기원전 30년)와 로마 속주 이집트(기원전 30년~기원후 395년)가 몰락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소베크와 소베크-라의 명성은 이 기간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에 대한 찬사는 그의 헌신적인 숭배 장소의 확장과 그를 종교 교리의 주제로 만들기 위한 학문적 노력을 통해 더 큰 명성을 얻었다.

 

악어 미라. 출처>구글 검색

 

파이윰(이집트어로 ‘호수의 땅’이라는 뜻, 구체적으로 모에리스 호수)은 소베크 숭배의 중심지였다. 대부분의 파이윰 마을들은 나름의 소베크 숭배를 개발했다. 즉 테브투니스에서는 소크네브투니스, 바크치아스와 소엑세이에서는 소콘노콘니라는 현지화된 소베크 숭배를 만들었다. 카라니스에서는 프네페로스와 페추코스라는 두 가지 형태의 신이 숭배되었다. 그곳에서는 미라화된 악어가 페추코스의 숭배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파이윰의 중앙에 위치한 수도인 크로코딜로폴리스(또는 세데트)의 수호신인 소베크 세데티는 소베크의 가장 두드러진 형태였다. 소베크를 기리는 광범위한 건축 프로그램이 세데트에서 실현되었는데 이는 세데트가 전체 아르시노이테 놈의 수도이자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소베크의 주요 신전을 확장하려는 노력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Ptolemy II. 기원전 308년~기원전 246년)가 추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데트 본당의 전문 성직자들은 스스로를 ‘악어 신들의 예언자’, ‘호수 땅의 악어 신들의 시신을 매장하는 자’라고 자랑하면서 소베크를 섬기는 역할만 담당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파이윰 가장자리에 있는 바크치아스, 나르모우티스, 소크노파이오우네소스, 테브투니스, 테아델피아 등의 정착지에서는 소베크 신전과 성직자 및 그의 지역 화신과 관련된 수많은 파피루스, 도상학 및 비문이 제공된다. 이들 정착촌은 로마 통치 하의 의식 관행, 사원 경제, 성직자 가족의 사회적 관계를 연구하는데 핵심이다.

 

파이윰 외곽에 있는 이집트 남부의 콤 옴보는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 시대에 가장 큰 소베크 숭배 중심지였다. 콤 옴보는 아스완에서 북쪽으로 약 48km 떨어져 있으며 그리스-로마 시대(기원전 332년~기원후 395년)에 건설되었다. 이곳의 신전은 ‘소베크의 집’을 의미하는 페르-소베크라고 불렸다.

 

무엇보다도 소베크는 자신의 수호 동물인 크고 난폭한 나일 악어의 사악한 평판에 부응하는 공격적이고 동물적인 신이었다. 그의 일반적인 별칭 중 일부는 이러한 성격을 간결하게 묘사하는데 그 중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강탈을 좋아하는 그’, ‘짝짓기를 하면서 먹는 그’, ‘이빨이 뾰족한’ 등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하나 이상의 유명한 신화에서 큰 자비를 보여준다. 호루스와 융합되어 결과적으로 중왕국 시대의 오시리스, 이시스, 호루스의 삼주신이 된 후 소베크는 죽은 오시리스의 치료자로서 이시스와 연합하게 되었다.

 

소베크 부조. 출처>구글 검색

 

소베크가 보호의 신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치유와의 이런 연관성 때문이었다. 그의 맹렬함은 악을 물리치는 동시에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소베크는 개인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특히 고대 이집트 역사 후반기에 봉헌 제물을 공동으로 받는 신이 되었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 통치 시기 이집트에서는 악어가 미라로 보존되어 소베크 숭배 중심지에 전시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소베크는 또한 소베크-라로서의 태양 속성의 순환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미라 악어 알을 제공받았다. 마찬가지로 악어는 종교적인 이유로 살아있는 소베크의 화신으로 사육되었다. 악어가 죽으면 성스러운 의식을 통해 미라로 만들어졌으며 이는 수호신의 신성하지만 현세적인 현현이었다.

 

이 관습은 크로코딜로폴리스(파이윰 주의 주도)의 주요 사원에서 특별히 실행되었다. 이 미라 악어는 입과 등에 새끼 악어가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악어는 새끼를 부지런히 돌보는 몇 안되는 파충류 중 하나로 종종 이런 방식으로 새끼를 운반한다. 미라화를 통해 동물 행동의 이러한 측면을 보존하는 관행은 악어가 새끼를 보호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집트 국민을 보호하기 때문에 사나운 소베크의 보호 및 양육 측면을 강조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 통치 시절 이집트에서는 소베크를 중심으로 ‘파이윰의 서’라고 불리는 지역 단행본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며 소베크-라가 매일 하늘을 통과하는 태양의 움직임과 함께 하는 여행에 집중했다. 문헌은 또한 라의 현현으로서 창조에서 소베크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헤르모폴리스의 전통적인 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오그도아드(태초의 여덟 신)와 다르지 않고 모에리스 호수의 원초적인 물에서 솟아났다고 알려져 있다. 이 문헌의 다양한 사본이 다수 존재하며 많은 학자들은 이 문헌이 고대에 베스트셀러로 대량 생산되었을 것이다. 파이윰과 소베크 사이의 통합적인 관계는 이 문헌을 통해 강조되며 그의 광범위한 영향력은 파이윰 외부 지역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문헌의 일부는 상이집트의 콤 옴보 신전에 다시 씌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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