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태초에 우주는 혼돈Chaos이라 불리는 허공만이 존재했다. 그리스 신화의 시작은 이 혼돈의 허공 속에서 창조의 힘이 출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가 그리스 신화에서 흔히 알고 있는 창조의 힘이 바로 지모여신地母女神 가이아Gaia다. 크로노스Kronos와 제우스Zeus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 계보가 모두 가이아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여러 고대 그리스 문헌에 따르면 가이아 말고도 또 다른 창조의 힘 즉 창조신이 등장한다. 물론 현재 그리스 신화에서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또 다른 버전에는 가이아에 해당하는 창조의 여신 에우리노메Eurynome가 등장한다. 에우리노메는 태초의 뱀 오피온Orphion과 결합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창조 활동은 뚜렷한 계보를 형성하지 못하고 잊혀지고 만다. 왜 그랬을까? 토마스 불핀치(Thomas Bulfinch, 1796~1867, 미국)가 정리를 소홀히 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창조신으로서의 에우리노메와 오피온을 체계화한 사람은 영국의 시인 로버트 그레이브스(Robert Graves, 1895~1985)로 알려졌다. 그레이브스에 따르면 창조의 여신 에우리노메는 비둘기로 형상화되었다. 혼돈을 깨고 우주에 최초로 존재한 에우리노메는 하늘과 바다를 분리한 후 오피온을 낳았다. 오피온이 에우리노메와 상관없이 태초에 존재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혼돈을 깬 에우리노메는 거대한 알을 하나 낳았는데 오피온이 똬리를 틀어 그 알을 따뜻하게 감쌌고 드디어 그 알이 부화하면서 우주의 모든 존재가 생성되었다고 한다. 즉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비롯해 하늘의 신 우라노스Uranus, 산의 신 우레아Urea, 바다의 신 폰토스Pontus가 그 알에서 나왔고 우주의 별과 행성들도 모두 에우리노메의 알에서 생성되었다고 한다. 한편 또 다른 문헌에 따르면 에우리노메와 오피온은 크로노스와의 싸움에서 져서 바다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2세기 경 파우사니아스Pausanias가 쓴 <그리스 안내>라는 책에는 에우리노메가 인어의 형상을 하고 등장하기도 한다. 결국 창조신으로서 에우리노메와 오피온은 그 역할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지 못하면서 때로는 또 다른 버전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에게 패배함으로써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태초의 여신 에우리노메는 비둘기로 형상화되었다. |
게다가 에우리노메의 존재는 극히 일부 그리스 고대 문헌에만 존재하는데 다른 그리스 신들과는 달리 체계화되지 못하고 창조신에서부터 보통의 신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기도 한다. 헤시오도스(Hesiodos, B.C8세기경)의 <신통기>에는 오케아노스Oceanos와 테티스Thetis의 딸로 등장해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강의 신 아소포스Asopos를 낳았다고도 한다. 또 호메로스(Homeros, B.C8세기경)의 그 유명한 <오디세아아>에서는 오디세우스Odysseus의 아내 페넬로페Penelope의 시녀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 그리스 신화에는 페르시아의 왕으로서의 에우리노메가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꽃에 관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에우리노메가 낳은 알을 오피온이 품고 있다. 이 알에서 세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
태양신 헬리오스Helios를 사모하는 님프 클리티아Clytia가 있었다. 하지만 헬리오스가 사랑하는 신은 따로 있었다. 헬리오스는 에로스의 납화살을 맞고 레우코토에Leucothoe라는 처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와 전쟁의 신 아레스Ares는 헤파이스토스Hephaistos에게 불륜 현장을 들켜 큰 망신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 사실을 헤파이스토스에게 알려준 신이 바로 헬리오스였다. 아프로디테가 헬리오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들 에로스를 시켜 납화살을 쏴 레우코토에와 사랑에 빠지게 한 것이다. 어쨌든 클리티아는 자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헬리오스를 짝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클리티아는 레우코토에에게 불타는 질투심을 느끼고 그녀를 모함하기에 이른다. 클리티아는 레우코토에가 헬리오스에게 순결을 잃어 처녀가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이 소문을 들은 레오코토에의 아버지 에우리노메는 딸을 산 채로 땅에 묻고 말았다. 레우코토에가 죽었다고 해서 헬리오스가 클리티아를 사랑할 수는 없었다. 에로스의 납화살을 맞으면 어떤 신도 그 운명을 거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클리티아는 9일 동안이나 굶으며 태양신 헬리오스만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땅에 박혀 해바라기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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