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이 노래한 아홉 뮤즈의 맏이, 칼리오페

2026. 5. 11. 07:00신화와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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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의 어머니시여, 저를 위해 노래해 주소서/산과 깊고 어두운 바다를 노래해 주소서/호수와 숲의 요정들을  노래해 주소서/모든 합창단의 여인들이여, 마음껏 노래해 주소서/명예와 운명, 영광을 노래해 주소서/ 뮤즈의 어머니시여, 저를 위해 노래해 주소서

<중략>

저는 칼리오페와 사랑에 빠지고 있어요/그녀는 누구의 것도 아니니 저에게 주지 않겠어요?/그녀가 내게 눈빛으로 말하고 있어요/거짓을 쫓는 데 너무 지쳤어요/뮤즈의 어머니, 어디 계시든/난 이미 제 인생을 훨씬 더 오래 살았어요

<중략>

나를 강가로 데려가 주시고 당신의 매력을 보여주세요/당신의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품에 잠시 누워 있게 해주세요/나를 흔들어 깨워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세요/바람처럼 나를 투명하게 만들어 주세요/내 마음은 방황하고 떠돌고 있어요/가볍게 여행하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서사시와 노래의 여신, 칼리오페

 

201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팝가수 밥 딜런의 노래 ‘뮤즈의 어머니(Mother of muses)’ 가사 중 일부이다. 대중가수로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첫 사례인만큼 당시 논란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가 부른 노래들의 가사를 읽어보면 고개를 끄덕일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뮤즈의 어머니’는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에 발표한 노래다. 여기서 ‘뮤즈의 어머니’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를 말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의 각 분야를 담당하는 아홉 명의 여신을 ‘뮤즈(Muses)’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무사이(Musai)의 영어식 표현이다. 밥 딜런이 사랑에 빠졌다고 노래한 칼리오페는 이 아홉 명의 뮤즈 중에서 서사시와 노래를 담당한 여신이었다. 자신의 노래에 칼리오페를 소환한 이가 비단 밥 딜런 뿐이었을까?

 

그리스 신화에서 칼리오페(Calliope)는 서사시와 노래를 관장한 여신이었다. 그녀는 무사이(무사 또는 뮤즈의 복수형)의 장녀이자 가장 존경받는 무사였다. 예술 작품에서 그녀는 종종 무릎에 석판을 얹고 손에 펜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호메로스(기원전 8세기경)는 칼리오페의 직접적인 영감을 받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서사시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를 썼다고 전해진다. 서사시에 대한 그의 뛰어난 재능 때문에 그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칼리오페의 아들로 불리기도 했다. 칼리오페는 제우스와 므네모시네(기억의 여신)의 딸이었다. 칼리오페는 아홉 명의 무사이 중 한 명으로 나머지 여덟 명의 무사이는 클리오(역사), 에우테르페(피리 연주), 탈리아(희극), 멜포메네(비극), 테르프시코레(춤), 에라토(서정시 및 연애시), 폴리힘니아(성가), 우라니아(천문학) 등이었다. 헤시오도스(기원전 8세기경)에 따르면 칼리오페는 아홉 무사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뮤즈였다고 한다.

 

노벨문학상 메달 뒷면에 새겨진 뮤즈와 시인.

 

무사이는 문학과 예술의 수호 여신으로 고대 세계의 모든 예술 활동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인간과 신 모두에게 숭배받았다. 음악과 춤의 신이자 예술의 수호신인 아폴론은 무사이의 수호신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홉 명의 뮤즈는 각각 특정한 예술 형식을 상징하게 되었다. 뮤즈들은 집단적으로 헬리코니아데스 또는 올림피아데스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들이 자주 드나들던 여러 장소 특히 보이오티아의 올림포스 산과 헬리콘 산에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뮤즈들은 올림포스 산에 살면서 노래로 올림포스 신들을 즐겁게 하고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헬리콘 산에서는 히포크레네의 신성한 샘과 제우스 제단 주위에서 춤을 추었다고 전해진다.

 

'아름다운 목소리'라는 뜻의 칼리오페는 뮤즈들의 우두머리로 여겨졌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현명한 여신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시의 뮤즈로 시작했으며 이후 서사시의 뮤즈로 발전했다. 사시의 뮤즈로서 칼리오페는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년~기원전 19년), 오비디우스(기원전 43년~기원후 17년), 단테 알리기에리(1265년~1321년) 등 역사 속 위대한 서사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칼리오페는 서사시의 평가 기준을 정했으며 시인들이 작품을 집필할 때면 늘 그녀를 소환했다. 예술 작품에서 칼리오페는 종종 앉거나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는데 마치 다음 위대한 서사시를 쓰기 위해 준비하는 듯 필기구와 서판을 들고 있었다.

 

석판과 나팔을 들고 있는 칼리오페_샤를 메니에(1798)

 

칼리오페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인 오르페우스의 어머니였다. 오르페우스는 아버지 아폴론으로부터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전해지지만 일부 전승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트라키아의 왕 오에아그로스라고 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오르페우스는 노래로 어머니를 불렀다. 칼리오페와 아폴론, 또는 오에아그로스 왕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또 다른 위대한 음악가이자 웅변가인 리노스의 부모이기도 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칼리오페는 강의 신 스트리몬과의 사이에서 트라키아의 왕 레소스를 낳았으며 아버지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코리반테스(키벨레 숭배자들)를 낳았다고 한다.

 

칼리오페는 아도니스, 아프로디테, 페르세포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아도니스는 어머니 스미르나가 아버지를 속여 근친상간을 저지르고 임신한 후 나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신들은 스미르나를 몰약 나무로 변신시켰고 10개월 후 나무가 갈라지면서 아도니스가 태어났다. 아도니스의 아름다움은 아프로디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프로디테는 어린 아도니스를 훔쳐 상자에 숨겨 페르세포네에게 맡겼다. 페르세포네는 상자를 열어 아도니스의 아름다움을 직접 확인하고는 아프로디테에게 돌려주기를 거부했다.

 

제우스는 칼리오페에게 아도니스를 누가 차지할지 결정해달라고 부탁했다. 칼리오페는 아프로디테와 페르세포네가 아도니스와 함께 1년 중 절반씩을 보내도록 결정했는데 아프로디테는 천상에서, 페르세포네는 지하 세계에서 아도니스와 보내게 될 것이었다. 이 결정에 격분한 아프로디테는 칼리오페의 아들 오르페우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녀는 트라키아의 여신들을 선동하여 최면에 걸린 오르페우스를 공격하게 했고 광기에 휩싸인 여신들은 결국 오르페우스를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우라니아와 칼리오페_시몽 부에(1612)

 

모든 그리스 신들처럼 뮤즈들도 자신들의 예술적 재능과 능력이 무시당하면 경쟁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경쟁심은 타미리스 신화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트라키아 출신의 음유시인 타미리스는 여행 중에 뮤즈들을 만났다. 그는 어리석게도 자신들이 뮤즈들보다 노래 실력이 뛰어나다고 자랑했다. 이에 분노한 뮤즈들은 그의 눈을 멀게 하고 음악적 재능을 빼앗고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들었다. 피에리데스도 마찬가지였다. 부유한 지주 피에루스는 자신의 아홉 딸인 피에리데스 역시 뮤즈들보다 노래 실력이 뛰어나다고 주장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뮤즈 우라니아는 미네르바(그리스의 아테나)에게 이 경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라니아는 피에리데스가 승리하면 에마티아 평원에 있는 자신들의 집을 뮤즈들에게 주겠다고 제안했고 패배하면 보이오티아의 신성한 샘 두 개를 피에리데스에게 넘겨주겠다고 했다고 했다. 님프들은 심판으로 선출되어 공정하게 심판하겠다고 맹세했다. 칼리오페가 뮤즈들을 대표하여 노래를 불렀다.

 

님프들은 칼리오페의 승리를 선언했고 패배에 분노한 피에리데스는 무사이를 모욕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자 피부에서 깃털이 돋아나고 얼굴에 부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들은 하늘로 날아올랐고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파우사니아스(기원전 115년경~기원전 180년경)에 따르면 세이레네스 또한 헤라의 설득에 넘어가 뮤즈에게 노래 대결을 신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뮤즈들은 상대를 압도했고 세이레네스의 깃털로 스스로 승리의 왕관을 만들어 썼다.

 

마케도니아의 에마티아 왕 피에로스는 뮤즈들에게 최초의 제물을 바쳤고 트라키아에서 헬리콘 산 기슭에 위치한 테스피아이까지 뮤즈 숭배가 확산되도록 도왔다고 한다. 테스피아이에는 뮤즈 신전과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헬리콘 산 근처에는 뮤즈들을 위한 조각상과 성스러운 우물이 있는 성역이 있었다. 리베트리온 산에는 뮤즈들의 성스러운 동굴이 있었다. 테스피아인들은 헬리콘 산에서 뮤즈 축제인 무세아를 열고 뮤즈들에게 우유, 꿀, 물을 제물로 바쳤다.

 

호메로스를 애도하는 칼리오페_자크루이 다비드(1812_

 

칼리오페가 시인과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중세 시대에도 여전했다. 이탈리아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는 <신곡>에서 칼리오페를 언급했다. 또한 영국의 시인 제프리 초서(1343년경~1400년경)는 그의 시 '명예의 집'에서 칼리오페를 언급했는데 이는 초서가 이름을 직접 언급한 유일한 뮤즈였다. 초서의 서사시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에서도 칼리오페가 등장하는데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가 마침내 연인이 되었을 때 느꼈던 큰 기쁨을 묘사하기 위해 칼리오페와 비너스의 도움을 구했다.

 

무사이(또는 뮤즈)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딸이었다. 칼리오페와 그녀의 자매들은 시와 노래, 서사시, 연극 등 그들의 영감을 원하는 수많은 예술인들에 의해 소환되었다. 그리스 신화는 기록되기 전 수백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였다. 기원전 8세기 이전에는 이 지역의 모든 신화가 구전 전통을 통해 전해졌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는 서사시를 처음으로 쓴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전통의 산물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기억에서 떠올랐고 그 당시에는 산문으로 낭송되지 않고 노래로 공연되었을 것이다. 수천 년은 아니더라도 수백 년 동안 신들의 이야기는 음악에 맞춰 노래로 불리고 있었다. 시인들은 수년간 문자 이전의 그리스 세계 사람들을 교육하고 즐거움을 준 시적인 노래를 외우도록 훈련했다.

 

이야기와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신화와 전설을 더 기억에 남기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시인들은 곡조에 맞춰진 단어를 더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었고 공연을 통해 관객의 기억 속에 이야기를 더 오래 간직할 수 있게 했다. 따라서 칼리오페는 단순히 쓰여진 단어에 영감을 준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야기가 설정된 노래에도 영감을 주었다. 서사시의 작가와 연주자는 시인뿐만 아니라 가수였기 때문에 그녀는 서사시의 여신이자 가수이기도 했다. 따라서 구전 전통에서는 뮤즈가 므네모시네와 연결되는 것이 중요했다. 뮤즈는 어머니가 기억의 화신이었기 때문에 정확성과 예술성을 고취할 수 있었다. 뮤즈의 초대는 원작자가 영감을 받는 데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뮤즈의 반복은 그들과 함께한 단어와 음악이 오래 기억될 수 있도록 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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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쓰인 시가 공연을 대신한 지 한참 후에도 시인들은 이 전통에서 칼리오페를 계속 소환했다. 초기 로마 제국 시대에 글을 쓴 베르길리우스와 오비디우스는 신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할 때 그리스 뮤즈 특히 칼리오페를 계속 불러들였다. 서사시의 뮤즈는 그녀의 역할이 이 신화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특히 중요했다.

 

칼리오페의 자매들은 다른 유형의 예술 작가와 공연자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에라토의 연애시나 탈리아의 희극과 같은 예술은 훨씬 덜 진지한 주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칼리오페에게서 영감을 받은 서사시는 신들의 이야기와 사람들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그들의 낭송은 종종 로마의 평민들에게 가장 접근하기 쉬운 종교 교육의 한 형태였다. 서사시는 신들과 직접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잘못 기록되면 신들을 모욕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신화에서 칼리오페는 가장 저명한 뮤즈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역할은 신들의 이야기와 그리스 사람들의 역사가 가능한 한 최선의 방식으로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칼리오페는 서사시와 노래의 무사(또는 뮤즈)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서사시는 청중을 즐겁게 하고 시인과 음유시인들이 수천 줄에 달하는 시구를 암기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음악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서사시는 주제의 심각성 때문에 암기가 매우 중요했다. 올림포스 신들의 이야기를 잘못 전달하면 청중을 오도할 뿐만 아니라 신들의 노여움을 살 수도 있었다. 이러한 오류를 피하기 위해 서사시는 칼리오페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를 기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신화가 기록된 후에도 이러한 기원은 그리스와 로마 시의 전통적인 특징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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