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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빚 체제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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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의 마법/리차드 디인스트 지음/권범철 번역/갈무리 펴냄

 

우선 저자가 말하는 빚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빚짐은 빚과 어떻게 다른가?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빚(debt)이 “셀 수 있”는 “좁은 경제적 개념”이라면 빚짐은 “현실의 빚[채무]들로 환원될 수 없는 책임과 사회적 귀속 그리고 상호 의존의 차원들을 나타”내는 “보다 넓은 존재론적 개념”이다. 즉 빚짐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들이 형성하는 다양한 협력적 관계들, 상호 유대들, 그리고 그 유대들이 가능하게 만드는 집합적 능력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빚짐은 우리에게 자신의 그러한 생산적, 구성적 힘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보여주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그러한 빚짐과 빚이 구분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빌려오면 “이 책은 현재의 빚[채무] 체제가 빚짐이라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차원을 포획하여 그것을 이윤의 동력으로 전환시킨다고 주장한다.”(310쪽)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건 빚짐의 상호 유대와 그것의 능력보다는, 채무 체제의 폭력적인 양상이다. 그런데 빚짐이 잘 드러나지 않고 경험되기 어려운 것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것의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저자가 택하는 방식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채무 체제의 이면을 살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그러나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 즉 주거, 보건, 교육과 같은 문제들을 사회적 유대를 통해 해결하기보다는 빚을 내서 해결한다. 그러나 사실 그건 해결된 문제라기보다는 어쩌면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무거운 짐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분명 채무 체제가 가진 억압적인 면이다.

 

 


그런데 우리가 빚을 통해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어쨌든) 해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별반 소득도 없는 내가 만일 빚을 내서 집을 살 수 있다면, 그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것이 채무 체제가 보여주는 “현대적 연대의 일종의 전도된 상(像)”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사회의 “총 빚[채무] 수준을, 체계 전체가 원하는 물질적, 상상적, 상징적 자원들로 현재의 힘들을 증대시키는 집합적 능력의 표현”으로 간주한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인류가 협력하여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을 평가하는” “일종의 엑스레이”를 제공한다는 것이다.(100쪽)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쯤에서 우려를 표할지도 모른다. 빚을 내서 집을 사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더군다나 가계부채가 1,000조가 넘는 이 나라에서 그것이 경제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장황하게 설명하려 들지 모른다. 또 어떤 사람들은 빚을 내서 집을 사는 사람들의 무분별함을 근엄하게 꾸짖거나, 그러한 구매 행위는 결국 채권자에게 이용당하게 될 뿐이라고 충고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것들이 빚에 대한 기존의 담론들이 설파하는 내용들이다. 그 담론들은 빚의 팽창을 채권자의 사기라는 측면에서만 고찰한다. 그리고 타이른다. 갚지도 못할 빚을 져서는 안 된다고.

여기가, 저자가 기존의 담론들과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지점이다.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소비자 부채와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비롯한 가계부채의 팽창은, 방대한 띠의 사람들이 금융 지상낙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시도가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290쪽) 현재 금융 지상낙원에 대한 권리는 오직 자본에게만 있다. 자본은 위로부터 부과되는 신용의 형태를 통해 집합화된 잠재적 부를 포획한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이제 그 어느 때보다, (책임을 지지 않고 투자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소수를 위한 빚 없는 신용과 (선택의 여지없이 위험을 감수하는) 다수를 위한 신용 없는 빚이 존재한다.”(252쪽)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는 자본에게는 이상적인 코뮤니즘이다. 자본의 금고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샘을 누리지 못할 까닭은 무엇인가? 저자는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언급하는 사례를 가져와서 되묻는다. 여기 “72만 달러 가치의 주택에 대해 모기지를 취득한 연소득 1만 4천 달러의 캘리포니아 농장 노동자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 주택에 살아서는 안 된다고 프리드먼처럼 콧방귀를 뀌는 대신,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왜 안 돼?’ 어떤 포괄적인 주택 정책도 없고, 신용 회로들이 가로지르는 명백한 불평등을 감안할 때, 왜 농장 노동자의 레버리지가 월스트리트에서 매일 일어나는 거래들보다 더 터무니없다는 것인가?”(291쪽) 빚짐은 그러한 콧방귀에 항의하는, 자본만이 누리는 금융 지상낙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일종의 봉기”(290쪽)다.


우리는 한때 사회적으로 제공되던 것들(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기는 하지만), 즉 앞서 말한 주거·보건·교육과 같은 것들이 빠르게 사적 영역으로 넘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소득도 늘어나지 않고(올해 최저임금 인상액은 370원이다) 복지제도 역시 열악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빚을 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러한 빚들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빚들이 표현하는, “정치적 요구들로 재구성될 수 있는, 충족되지 않은 사회적 필요들”(291쪽)을 인식하는 일이다. 그러나 현재의 채무 체제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안은 물론 아니다. 이제 우리는 그 필요들을 충족할 수 있는 더 나은 방안을 찾아 나서야 한다.

저자는 불평등한 신용 체계와 억압적인 채무 체제를 넘어서기 위한 두 가지 시도들을 검토하는 것으로 급진적 빚짐 정치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첫째는 소액신용(microcredit)이다. 소액신용 기관은 소액 대출을 확장함으로써 개인들의 사회적 활력화를 이끌고 빈곤 가구를 최악의 상황에서 구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가난하게 만드는 지배적인 조건들을 바꾸지 않는 한에서만 그들을 결핍에서 구할 수 있다”(296쪽)는 점에서 문제로 남는다.

둘째는 희년(Jubilee)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희년은 성경에 따르면, “50년마다 선포되어야 하며, 모든 빚의 탕감, 원 소유주에 대한 주택의 ‘상환’과 토지의 반환, 노예와 종의 방면, 해당 연도 동안 노동의 중지를 요구한다.”(296쪽) 희년은 빚의 면제를 주장함으로써 “일련의 저항들을 결집할 수 있는 긴요한 급진적 요구를 제기”하지만, “이러한 유토피아적 가능성조차 타협될 수 있다.”(298쪽) 저자는 저개발 국가들의 빚 탕감을 주장했던 [희년 2000] 캠페인을 예로 든다. 빚은 실제 면제되긴 했지만, 그 대상은 신자유주의적 처방을 따른 국가로 한정되었다. 그리고 그 캠페인은 그 처방을 따르지 않는 국가들의 정치적 지위는 약화시켰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시도들에서 긍정적 요소를 뽑아낸다. 저자는 급진적 빚짐 정치의 가능성은 이 두 가지 시도들과 연관된 두 가지 태도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소액신용의 유토피아가 어떻게 경제가 초월론적 권리들이나 신성한 의무들이 없는 보편적인 상호 간 의무로 세워질 수 있을지 상상한다면, 희년의 유토피아는 어떻게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가 집합적 의지의 행동으로 폐기될 수 있는지 상상한다.”(305쪽)

빚짐의 정치는 이 두 가지 태도의 변증법적 종합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사르트르의 말을 빌려온다. “혁명의 목적은 … 모든 사람을 자유롭고 소외되지 않게 하면서 상호 의존하게 하는 것이다.”(306쪽) 그러니까 저자가 우리에게 당부하는 것은 이 두 가지다. 우리는 우리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채무 체제를 깨뜨리는 방법뿐 아니라 상호 의존하면서도 자유로운 사회적 유대로서의 빚을 구성하는 방법 또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로서의 빚이라는 관점에서 가계부채 문제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주거와 보건과 교육은 모든 사람이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는 의무들로 이해되어야 한다.”(291쪽) 주거, 보건, 교육 같은 것은 삶에 필수적이지만 개인이 혼자서 감당하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공통재에 무관심한 금융 체계의 계산에 위임되기에는 너무 중요한 것들”이 계산에 맡겨져 있는 불합리한 상황이 모든 위기를 불러온 것은 아닐까? 보건의료 체계에서 생명보다 이윤이 앞설 때 나타나는 결과를 우리는 메르스를 통해 목격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거, 보건, 교육을 유대로서의 빚짐으로 전환할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또 “연금 제도” 역시 “노동 없는 삶을 대비하려는 집합적 시도들”이다. 그런데 자본과 권력은 점점 더 “돈이 고갈”되어 연금을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살기 위해 기금이 필요한 사람들과 “[미적립] 채무를 줄이려는 사람들 사이에 정치적 의지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저자의 진단에 의하면 “지금까지는 후자 진영이 이기고” 있지만, “신용 체계가 불평등과 소비주의의 잘못된 선택을 가속하는 대신, 일종의 공적 사업으로 또는 더 낫게는 집합적 자립의 제도로 기능”하도록 하는 “급진적 역습”을 수행할 수 있다면 사태는 달라질 것이다.(291~292쪽)

빚의 이면에 ‘연대’가 있다면, 관건은 우리를 억압하는 빚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빚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요점은, 존재하게 될 빚이 공통재(the common good)의 최대한의 발전을 목표로 함으로써 각 개인의 최대한의 발전이 가능하도록 조직되고 구조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사회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통해 좀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 ‘우리’ 모두는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자원들을 지급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강요된 결핍보다는 공유된 풍부함의 원리에 기반한 정치적 프로그램이다.”(7~8쪽)

저자는 빚에 대한 이 책에서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불평등과 빈곤, 부시와 오바마의 국가안보전략(NSS), 프라다 상점의 건축, 록스타 보노의 보도사진, 맑스가 들려준 동화 등이 그것이다. 얼핏 보면 이 주제들은 서로 간의 연관성이나 빚과의 연관성이 커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불평등과 빈곤이 어떻게 현재의 채무 체제를 통해 양산되고 유지되는지, 국가안보전략이 어떻게 막대한 빚을 요구하는지, 프라다 상점이 어떻게 특별한 종류의 빚을 부과하며, 국제 개발 활동가 보노가 어떻게 현재의 채무 체제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는지, 그리고 맑스의 동화 속 장난감들이 어떻게 이행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지 알려준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막대한 금융 의무들에 얽매여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에 따라 마땅히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금융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유대로서의 빚의 발명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이룰 우리란 누구인가에 대해. 어쩌면 세계 도처에서 들려오는 빚의 정치에 대한 소식들은 그러한 고민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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