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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그들은 왜 셜로키언 놀이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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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왓슨이 간다/오성용/2012년

 

셜로키언을 아는가? 누구나 한번쯤 탐정 셜록 홈스의 사건 해결에 매료되어 밤을 샌 적이 있을 것이다.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이면서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까지 갖춘 셜록 홈스는 수많은 사건을 해결하면서 전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급기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탐정'의 대명사가 된 인물이다. 홈스에 대적할 인물로 프랑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이 창조한 아르센 뤼뺑을 들기도 하지만 홈스와 달리 뤼뺑은 천재적인 두뇌를 범죄에 이용하는 괴도라는 것이다. 셜로키언(Sherlockian)은 아서 코넌 도일의 추리소설 주인공인 셜록 홈스의 추종자를 뜻하는 말이다. 초기에는 소설 속 인물인 셜록 홈스를 실존 인물로 믿고, 홈스 이야기를 자세히 아는 사람을 가리켰으나, 지금은 셜록 홈스에게 애정이 있는 골수팬 모두를 포괄하는 말로 쓰인다.

 

저자가 셜록 홈스의 골수팬인지 여부는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 왓슨이 간다>는 셜록 홈스에 대한 오마주가 느껴지는 소설이다. 오성용의 소설 <여기, 왓슨이 간다>는 젊은 작가다운 기발하고 참신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셜로키언 놀이는 소설 속 주인공인 그와 그의 죽마고우 철록 사이의 우정을 상징하면서 특정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초등학교 3학년인 둘이 처음 만났던 1995년, 철록이 입안에 사탕을 굴리면서 말한 이름을 그는 '셜록'으로 잘못 알아들으면서 셜로키언 놀이는 시작된다. 셜록 홈스가 있으면 반드시 있어야 할 인물, 그는 자연스럽게 왓슨이 되었다. 소설은 누군가가 왓슨에게 꽤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기억의 속성들

 

왓슨,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모든 고통과 폭력과 불행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일까? 이 사건에는 어떤 존재 이유가 있을 걸세. 그렇지 않다면 이 세계는 우연이 지배한다는 것인데,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 하지만 그 목적이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답하기 힘든 문제일세. -<여기, 왓슨이 간다> 중에서-

 

누가 이 질문을 했고, 여기서 말한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전에 그가 기억의 속성들을 동원해 철록과 했던 셜로키언 놀이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 보자. 셜록 홈스에 대한 오마주라는 필자의 설명이 무색하게 철록과 그의 어린 시절은 그리 유쾌한 기억만은 아니지 싶다. 그렇다고 어두운 세계의 그것도 아니다. 그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봤을 그런 기억들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색인이 생략된 기록물처럼 원하는 대목을 찾아내기 위해 역행하고 목적지에 도달해 다시 순행하며 검토를 반복한다. 최종적인 기억의 시점에 의존하는 과거의 기억은 저마다의 날짜와 내역으로 선을 그으며 개별적인 기억으로 분절되는데, 지금 그가 떠올리고 있는 기억 또한 이에 해당한다. -<여기, 왓슨이 간다> 중에서-

 

철록과 그는 아니 셜록과 왓슨은 굿모닝문방구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실제 총처럼 생긴 장난감총을 훔친다. 이 때 처음으로 철록은 셜록이 되고, 그는 왓슨이 되지만 사실 이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과거의 사건이 임의로 재배치되는 경우는 역순으로 작동하는 기억의 속성으로 인해 정리하는 과정 혹은 반대로 꺼내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소한 오류에 가깝기 때문이다. 기억은 또 무언가를 생략하는 데 능하지만 지나간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02년 그는 셜로키언이 되고 그들은 본격적으로 셜로키언 놀이를 시작한다. 셜록은 여섯번 째 기숙사 탈출을 감행하고 진학실로 끌려간다. 그런 셜록의 옆에는 늘 왓슨이 있다. 그렇게 그들의 고등학교 시절은 끝이 나고 셜록은 군대를 간다. 

 

 

부정확했던 기억의 속성은 '상상'이나 '추론'으로 격상되고 비로소 그 사건의 실체가 밝혀진다. 셜록은 장남감총처럼 생긴 진짜 총의 총구를 입안으로 밀어넣고는 방아쇠를 당긴다.

 

그렇다면 어떤 것들이 기억으로 승화되는 것일까. 기억은 주관을 갖지 않고 따라서 의사를 수렴하지 않는다. 취사선택하여 그것을 조율하는 행위도 불가능하다. 기억의 대부분은 시각적인 요소로 이루어지고 여백은 후각, 미각, 청각, 촉각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도 있는데, 기억들의 편린을 재료로 새로이 조합되는 기억이 그러하다. 보통 무언가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오는 이러한 기억은 '상상'이나 '추론' 등으로 분류되며 내용의 대부분이 기존 기억들의 부산물로 짜기워진다. -<여기, 왓슨이 간다> 중에서-

 

셜록의 자살로 셜로키언 놀이는 끝났을까? 실제 아서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에서는 마이크로프트가 등장하는데 홈스의 형이자 홈스 못지않은 관찰력과 추리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마지막 사건' 편에서 셜록 홈스가 죽었다고 모두 생각했을 때 그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던 유일한 사람이다. 왓슨은 마이크로프트 형에게서 셜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셜록 홈스에 대한 오마주 소설답게 왓슨은 죽었다고 들은 셜록을 본다. 그것은 바로 꿈이다. 기억과 꿈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현실의 층 위에서만 작동하는 기억은 체계 없이 부유하는 꿈을 휘발시키고, 어렴풋이 한 때 그것이 있었다는 흔적만을 남길 뿐이다. 하지만 간혹, 정말로 이따금씩, 꿈이 기억을 파고들어갈 때가 있다. 깨고 나서도 기억되는 꿈이 바로 그 경우이며, 지금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기억이 그런 현실 같은 꿈에 대한 것이다. 꺼진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곡조에 춤을 추듯, 없는 기억이 그의 손을 붙잡는다. -<여기, 왓슨이 간다> 중에서-

 

셜로키언 놀이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진실은?  

 

 

소설 첫 부분에서 언급했던 질문의 실체는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비로소 명확해진다. 질문의 주체는 죽은 셜록이다. 이제 왓슨은 셜록이 되어 기억의 편린들 중 하나인 추리력을 동원해야 한다. 군대에서 자살한 아니 자살한 것으로 규정되어진 셜록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진실이 무엇인지, 자신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 누군가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줬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그는 고개를 파묻었다. 그러자 그 혼란스러움의 틈새를 넓혀가며, 발밑에서 또다시 어떤 기억이 비집고 올라왔다. 셜록은 그런 그의 귀에, 어떤 말을 속삭였다. -<여기, 왓슨이 간다> 중에서-

 

주인이 장님이었던 굿모닝문방구와 셜록의 다섯번째 탈출을 겪고 나서 집에서 기르던 시추 한마리를 데리고 온 사감이 있는 기숙사는 군대와 하나의 특징으로 연결된다. 바로 폐쇄성이다. 그 폐쇄성으로 인해 기억은 왜곡되기도 하고 파편이 되어 흩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명확한 진실을 알고 있다. 그 명쾌한 해답을 찾기 위해 왓슨은 무언가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오는 기억의 속성인 '상상'과 '추론'을 동원해야 한다. 셜록의 의문의 죽음 앞에서 왓슨, 그는 이제 철로키언이 되어야 한다.

 

저자가 철록과 그의 어린 시절을 되짚으면서 다양한 기억의 속성들을 언급한 것도 폐쇄적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암시해 주는 메타포이기도 하지만 문방구와 기숙사와 군대로 대표되는 폐쇄성이 사실은 열린 사회라고 자부하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라는 폭로이기도 하다. 자본과 권력을 쥔 자들이 '잘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와 같은 견고하지 못한 기억의 속성들을 이용해 법보다 위에 서는 경우를 흔히 보아왔지 않았냐 말이다. 그들의 셜로키언 놀이는 기억의 편린들을 모아 구름에 가려진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과정이자 '열린'을 가장한 폐쇄적인 사회에 대한 경고다. 아무리 진실을 감추려 하지만 셜록 홈스가 해결하지 못한 사건은 없었다. 셜록, 기다려라. 여기 왓슨이 간다. 셜록은 결코 죽어서는 안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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