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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자기혐오는 어떻게 아름다운 문학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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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얼굴/송기원/1993년

 

문학을 삶의 어떠한 가치보다 우위에 놓고 그것에 끌려 다니던 문학청년 시절의 탐미주의부터 비롯하여, 머지않아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러서도 아직껏 아름다움 따위를 찾는다면, 남들에게 철이 없거나 얼마쯤 덜떨어지게 보이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쭙잖게 고백하건대, 십 년 가까이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한 채 거의 절필상태에서 지내다가 가까스로 다시 시작할 작적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아름다움 때문이다. -<아름다운 얼굴> 중에서-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일당은 그 해 7월4일 중대 발표를 한다. 당시 계엄사 당국은 김대중이 집권욕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사조직인 민주연합 집행부에 복학생을 흡수, 학원조직에 연결시켜 서울대·전남대생 등에 총학생회장 선거자금 또는 데모자금을 지급, 자신의 출신지역인 호남을 정치활동의 본거지로 삼아 다른 지역에 앞서서 학생시위와 민중봉기가 이루어지도록 지원, 광주사태가 악화되자 호남출신의 재경(在京) 폭력배 40여 명을 광주로 보내 조직적으로 폭력시위를 주도토록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발표했다.('네이버 지식백과사전' 인용)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군부가 김대중을 학원소요사태와 광주민주화운동의 배후조종자로 발표한 사건으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수많은 정치인, 시민운동가, 예술인들에게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했다. 

 

 

송기원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작가 중 한 명이다.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었을 쉰을 바라보는 그가 느닷없이 아름다움을 언급한 것은 주책(?)이라면 주책일 수도 있겠다. 그런 그가 주책스러움을 감수하고 아름다움을 얘기한 것은 그가 어떻게 문학인이 되었는지를 밝히는 자기고백이자 이 비루한 세상에서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다. 정리하자면 제2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송기원의 <아름다운 얼굴>은 작가 자신의 자기고백적 자전 소설이다. 작가를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한 자기혐오는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자기혐오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기까지의 인생 역정을 자전적인 고백을 통해 드러내는 작품이 바로 <아름다운 얼굴>이다. 

 

작가이자 주인공 '나'의 자기혐오는 국민학교와 중학교의 졸업사진에서 날카로운 면도날 자국을 남긴 채 지워진 자신의 얼굴로 상징화 된다. 장돌뱅이의 자유분방함을 자랑으로 살아온 '나'는 어느날 기생집인 춘향관 대문 옆 모퉁이에서 양말을 건내준 낯선 사내와의 만남 이후 심각한 자기혐오에 빠져든다. 언제, 어떻게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나'는 그 낯선 사내가 '나'를 낳아준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나'는 건달패이자 노름꾼인 아버지와 장돌뱅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던 것이다. '나'의 출신성분은 자기혐오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졸업사진에서 날카로운 면도날 자국은 '나'가 아닌 '나'를 가리고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었음을 고백한다.

 

소년도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사내는 소년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서, 소년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조건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삼십 촉짜리 흐른 전등 아래서 손을 떨며 소년이 면도날로 지운 것은 어쩌면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사내의 얼굴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소년은 자신의 삶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조건이 된 채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지웠을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 중에서-

 

사춘기를 거치면서 '나'의 출신성분은 치부가 되어 고등학교 자퇴를 하고, 자살을 생각하는 등 방황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이렇듯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던 자기혐오를 탈출한 출구가 있었으니 바로 문학이었다. '이건 바로 내 이야기 아닌가!' '나'에게 소설은 벼락과도 같은 충격이었다. 문학은 '나'가 세상에 끼어들 수 있는 일종의 문과도 같았다. '나'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 시(詩)를 선택했고 세상에 대한 무기로 위악(爲惡, 일부러 악한 체 함)을 배운다. 위악은 탐미주의 혹은 허무주의 등과 되섞여 세상에 대하여 깊게 병든 한 청년의 문학이 되어갔다. 

 

이미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었지만 정작 '나'만 모르고 있었을까. '나'의 자기혐오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감옥에 있는 동안 자살한 어머니의 일이며 그의 내팽개치다시피 한 처자식을 거두어준 문단의 선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빚을 갚기 위해 출판사에 들어가 10년을 보내지만 '나'는 또 다시 사춘기 시절의 자기혐오에 빠지고 만다. 선후배들에게 빚을 갚는 마음이나 문학에 대한 감동보다는 이윤을 추구하는 데 급급한 출판 경영인의 자신을 본 것이다. 자기혐오는 자기애(愛)다. 자기애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게 있다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내가 상처 입힌 모든 이들의 것이라고.

 

누군가는 처음으로 빠지는 자기혐오란 어쩌면 훗날 화려하게 피어날 아름다움이라는 꽃의 싹눈은 아닐까. 그리항여 그 싹눈에서 대지를 향해 뻗어가는 첫 뿌리는 아닐까. 이윽고 대지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다음, 이번에는 푸른 하늘을 향해 키를 높여가는 줄기는 아닐까. 그리고 줄기에서 가지로 퍼져 나와 온몸 가득히 문을 열어 탄소동화작용을 하고 있는 이파리는 아닐까. 그렇듯 오랜 낮과 밤을 보낸 끝에 이슬이 많이 내린 어느 날 아침 봉긋이 맺어보는 꽃봉오리는 아닐까.

훗날 그것이 악이나 독의 꽃이 될지 아직은 아무것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아름다운 얼굴> 중에서-

 

저자는 왜 치부라면 치부랄 수도 있는 과거 자기혐오에 빠지게 했던 가족사와 개인사를 이렇듯 낱낱이 고백한 것일까. 자기혐오를 아름다움으로까지 미화(?)시키면서까지 정작 저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본 사람만이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다고들 한다. 저자를 깊은 자기혐오의 수렁에 빠지게 했던 비루한 가족사를 아름답게 그린 것은 그런 그의 가족이 몸담고 있었던 하층민에 대한 따뜻한 시선의 발로는 아니었을까. 문학이란 그런 것일 게다. 사회의 어두운 곳, 그 어두운 곳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 따뜻한 시선이 문학이 주는 아름다움은 아닐까. 독자가 감동하는 것도 그 따뜻한 시선에 대한 말없는 공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자기혐오와 아름다움을 등가시하는 자기고백 중 '훗날 그것이 악이나 독의 꽃이 될지 아직은 아무것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라는 부분은 책을 덮고도 여전히 뇌리 속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아름다움을 가장한 글로 수많은 이들을 자기혐오에 빠지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결코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지 못할 그런 자기혐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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