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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역사왜곡 논란을 민주주의 조급증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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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골목들/이남희/1995년

 

최근 일본 우익 인사들의 과거사 부정은 전세계적인 비난을 자초하고 있다. 일본 극우의 원조로 불리는 이시하라 도쿄 지사는 조선 침략에 대해 무력이 아닌 조선인들의 총의에 따라 합병했다는 막말을 하는가 하면, 아베 현 일본 총리는 2차 세계대전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해괴한 논리를 동원하고 있다. 급기야 차세대 일본 총리로 주목받고 있는 하시모토 오사카 지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인하면서 주일미군에게는 매춘 활용을 건의하기도 해 물의를 빚고 있다. 일본 우익들의 군군주의를 향한 꿈이 갈수록 조직화되고 치밀화되는 것은 패전으로 조성된 자학사관 체제를 타파할 필요가 있다는 일본내 보수 여론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최근 일본 우경화의 근거가 되고 있는 자학사관은 우리나라에서도 역사 부정의 논리로 이용되고 있으니 한국과 일본의 보수우익이 하나의 뿌리에서 자란 유전자적 동일체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보수우익들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독재자로 기술한 역사 교과서에 대해 자학사관의 발로라며 역사 부정은 물론 독재자들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이들의 역사 부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민주화 투쟁의 역사마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최근 5.18광주항쟁을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보수우익인사들과 일베 회원들의 망언이 단적인 예라 하겠다. 수백 년에 걸쳐 완성된 서양의 민주주의에 비해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 역사가 대단히 짧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성숙된 민주주의로 가는 시행착오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최근 몇 년에 걸쳐 조직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역사 후퇴와 왜곡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사회의 조급증쯤으로 치부해도 된단 말일까.

 

 

세상 끝의 골목들

 

이남희의 소설 <세상 끝의 골목들>은 주인공 '나'가 꿈에서 본 사그라다 파밀리아 속죄성당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로부터 시작한다.

 

그 꿈에서 나는 시에스타로 잠든 고딕 지구를 방황하고 있다. 고딕 지구란 이름 그대로 매연에 그을린 우중충한 중세의 건물들이 남아 있는 바르셀로나의 항구 부근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는 로코코 양식의 건물들이 아름답다거나 장엄하다고 하는 의견에는 한 번도 찬성해 본 적이 없다. 어찌된 일인지 그것들은 나에겐 중세의 그로테스크한 밤을 연상하게 한다. 마녀사랑이라든지, 검은 미사라든지, 화형과 같은 것들……건물 외면에 새겨진 조각들은 고양이가 먹다 토해놓은 생선 내장처럼 보이기도 하고 더 역겹게는 부스럼투성이의 문둥병 환자를 떠올리게 하는 적도 있다. -<세상 끝의 골목들> 중에서-

 

왜 사그라다 파밀리아 속죄성당이 악몽은 '나'에게 되었을까.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속죄성당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1800년대 착공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아직도 건축 중인 것으로 유명하다. 정확히 1882년에 공사를 시작한 사그라다 파밀리에 성당은 1883년 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Antonio Gaudi y Cornet)가 맡으면서 애초 계획은 수정되었고 가우디가 죽은 1926년까지 교회의 일부만 완성했다. 나머지 부분은 현재까지도 계속 공사 중에 있고 공사비용은 후원자들의 기부금만으로 충당되기 때문에 성당 전체가 완성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사그라다 파밀리에 성당에 대한 이 정도의 지식이라면 악몽의 원인을 유추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저자는 사그라다 파밀리에 성당의 '진행 중'이라는 속성을 우리사회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과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좌절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짜증과 조급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상이 바로 사그라다 파밀리에 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이 쓰여진 1990년대의 정치 상황을 보면 저자가 느끼는 민주주의에 대한 짜증과 조급함은 더욱 분명하게 실체를 드러낸다.

 

민주화 열기가 활화산처럼 분출했던 1980년대. 반세기 가깝게 이 땅을 지배했던 권위주의는 6.10항쟁을 기점으로 당장이라도 시민 권력으로 대체될 것처럼 보였던 시기가 1980년대다. 그러나 1990년대의 시작은 과거 군사정권과 타협한 문민정부의 출현이었다. 게다가 90년대는 80년대의 열망이 과거 권위주의의 위장전술로 동력을 잃어가고 있는 시대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화와 민주주의 시대의 좌절은 1990년대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화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80년대의 흔적은 빠른 속도로 사위어 들었다. 갈수록 80년대와 90년대 사이에는 깊은 도랑이 패어갔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 가로놓인 날짜변경선처럼 실체는 손에 잡히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이 시곗바늘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경계선 같은 것이 그어지고 있었다. 동구권이 무너지고 소련이라는 나라는 사라졌다. 희망도 빛도 바랬다. 부스럼 딱지가 앉듯 불감증은 널리 퍼져갔다. 마치 무성한 여름 숲이 어느새 낙엽이 되어 지고 그 낙엽은 순식간에 썩어 부식토가 되듯 그렇게 변해갔다. -<세상 끝의 골목들> 중에서-

 

또 저자가 90년대를 대표했던 민중시인인 김남주 시인의 죽음과 '나'의 관계를 소설 전반에 배치한 것도 민주주의를 향한 짜증과 조급함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 생전에 '나'와 만났던 김남주 시인은 '나'의 조급함에 대해 입버릇처럼 '앞으로, 머지않아 괜찮아지겠지.'라는 말로 위로하곤 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투사 김남주 시인이 말이다. 김남주 시인 또한 민주주의를 향한 꿈이 무너져가는 현실을 목도했을텐데 어떻게 잔잔한 미소로 조급함을 위로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사람 사이의 작은 사랑'이었다. '연대'라는 말이 적절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사이의 작은 사랑'은 언젠가 이루고 말 희망의 끈이 아닐까.  

 

나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저 성당은 도대체 언제 완공되는 거냐고, 백 년이 넘도록 지어오고 있다니 지루하지도 않냐고. 그랬더니 그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른다. 완공되는 날짜 같은 덴 관심이 없다, 앞으로 오십 년이 더 걸릴지 백 년이 더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계속 지어지고 있으니까 그것으로 됐다는 거였다. -<세상 끝의 골목들> 중에서-

 

역사왜곡을 바라보는 심각한 우려가 민주주의에 대한 단순한 조급증 때문일까

 

90년대의 좌절이 있고 또 다시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어쩌면 김남주 시인도 당시의 좌절을 지나친 열망 뒤에 찾아오는 일시적인 현상쯤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의 정의는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어떤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사람사는 세상의 불변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현실이 심히 우려스럽고 민주주의에 대한 단순한 짜증이나 조급증쯤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것은 80년대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조직적으로 역사 왜곡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여당 국회의원의 말을 빌리자면 박근혜 대통령이 그토록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것도 아버지인 박정희의 명예회복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정치 무관심은  특정 목표에 대한 집단적 열망을 분출시킬 수 있는 동력 예년만 못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과 자본과 언론을 장악한 세력의 조직적인 역사 왜곡은 시민들의 자각마저 왜곡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농후해진다. 어둠이 길어질수록 두렵고 불편했던 눈[目]도 어둠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는 법이다. 일부 세력의 역사왜곡을 민주주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시행착오로 치부하고, 이런 현실에 대한 심각한 우려의 시선을 민주주의에 대한 짜증과 조급증으로 폄하해서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의 역사왜곡 논란은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를 채우는 사실들은 보수와 진보의 시선이 다를지언정 역사의 진실은 결코 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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