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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이름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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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1972년~)의 <이정(而丁)>/2012년

 

내 이름에는 '물 수(水)'가 연달아 들어간다. 그래서일까. 어릴 적부터 이름없는 점쟁이들은 물을 조심하라고 했다. 열다섯 될 때까지만 물을 조심하면 그 이후에는 탄탄대로라나 어쩐다나. 내가 어릴 적 살았던 작은 시골마을에는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꽤 있었다. 내 바로 위 형도 그랬다. 동네 사정을 귀동냥으로 알고만 있어도, 내 이름을 한자로 옮길 수만 있어도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이 미래예언(?)은 어지간히 신경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날은 할아버지가 지어주었다는 내 이름에서 한글은 그대로 두고 한자만 바꾸면 안되나 생각하기도 했다. 사람이란 동물은 그렇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늘 찜찜한 구석을 갖고 산다.

 

이기호의 소설 <이정(而丁)>은 이름에 얽힌, 이름 때문에 일어난 사고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들춰낸다. 때로는 잊어야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들, 때로는 잊지 말아야 하건만 망각의 늪에 빠지고 마는 기록들. 이름은 이런 기억과 망각을 끄집어낸다. 개인이 과거에 갇혀 사는 것인지, 사회가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는 것인지 기억과 망각은 고스란히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도를 이용해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지만 현재는 여전히 과거를 들춰내려는 수구괴물들이 득실거린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제목만 보고도 무슨 이야기일지 대충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이정, 그녀는 지금 개명(改名)을 생각하고 있다.  그녀가 개명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지리산으로 떠났던 가족여행에서 화엄사를 방문하고부터이다. 화엄사 경내에 들어가기 전에 보았던 공적비. 고은 시인의 글로 쓰여진 공적비는 한국전쟁 당시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상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법당 앞 문짝 두 개만 태우고 화엄사는 물론 쌍계사와 선운사, 백양사까지 살려냈다는 어느 경찰 총경을 기리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결정적으로 개명을 생각한 데는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는 딸이 전해주는 공적비 주인공에 대한 후일담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 공적비 주인공은 휴전 이후 조선의용대 경력과 이현상의 장례를 치러 준 사실 때문에 좌익 혐의로 좌천 당하고 1958년 금강 곰나루에서 아들을 바위 위에 세워둔 채 '볼가강의 뱃노래'를 부르며 자살했는데 사흘 후에 보니 강바닥에서 전쟁 때 침수된 인민군 탱크를 꼭 끌어안은 채 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을 두고 좌익이었나 아니었나를 두고 딸과 아들의 대화가 오갔다.

 

그녀에게 문득 떠오른 것은 연좌제(緣坐制)였다. 왜 그녀는 법적으로는 이미 박물관의 박제가 되어버린 연좌제를 떠울렸을까.

 

 

연좌제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중국 명나라의 기초를 다졌다는 영락제다. 영락제는 송나라 유학자 방효유가 연적찬위(燕敵簒位, 연나라 도적이 제위를 찬탈했다)를 명분으로 명나라 건국에 협력하지 않자 그의 입을 찢고 친족 4대, 외족 3대, 처족 2대 등 구족을 참살했다고 한다. 구족을 멸한다? 영락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방효유의 문하생과 친우들까지 모두 10족을 죽였다고 한다. 구족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도 모반대역죄에 대해서는 삼족을 멸하는 연좌제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악법 중의 악법 연좌제가 폐지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때지만 이후 첨예한 이념대립과 분단이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관행적으로 유지되어 왔다. 1980년에 와서야 헌법적 요청으로 연좌제를 폐지를 규정하게 되었다. 헌법 제13조 3항에 제시된 연좌제 폐지에 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그녀가 아들과 딸의 대화에서 연좌제를 떠올린 것은 자신의 이름 때문이었다. 최이정(崔而丁). 이정(而丁)은 한때 '조선의 레닌'이라고 불리던 박헌영의 호이기도 하다. 이름을 짓기에는 그리 흔치 않은 한자다. 이 우연의 일치를 그녀는 결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의 특이한 이름을 통해 전혀 알지 못하는 친정 아버지의 과거 행적을 추측할 뿐이지만 공무원이었던 남편과의 이혼도 이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아들이 대학 진학과 동시에 ROTC 지원서를 내겠다는 말에 개명을 해서라도 상상 속의 친정 아버지의 과거를 지우고 싶어한다. 그녀는 여전히 연좌제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 때문에 아들이 피해볼까 걱정인 것이다.

 

"그래도 엄만 이번 기회에 바꾸고 싶어. 네 외할아버지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딸 이름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이젠 싫다. 더이상 이름 때문에 불안하게 살기도 싫고."

 

김명국, 그는 84세의 비전향 장기수다. 우리사회에서 비전향 장기수는 분단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가는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한다'를 주의자로서의 삶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1927년 경기도 양평생인 그는 '박헌영 학교'라고 불리는 '강동정치학원'에서 교육을 받은 뒤 경북 지역에서 유격활동을 하다 한국전쟁 때 북으로 후퇴했다 1953년 다시 '강동정치학원' 동기생들과 강원도당에 합류하기 위해 침투했다 경찰에 체포되어 1954년 3월부터 1995년 광복절까지 전향을 거부한 채 감옥에 남아있던 노인이다.

 

 

그가 다시 남으로 내려온 데는 또다른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1952년 북한에서는 당 간부들에 대한 전면적인 사상검증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953년 박헌영을 비롯한 이승엽, 설정식, 임화 등이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줄줄이 구속되고 피의 숙청을 당하고 만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로당파와 강동정치학원 출신들은 위태로워진 신분 때문에 월남할 수밖에 없었다.

 

양심의 자유를 지키며 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던 그도 일대 정신적 변화를 겪게 된다. 그것은 바로 신앙처럼 지켜왔던 주의자로서의 삶에 대한 체념이었다. 스스로도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동료 비전향 장기수의 장례식 때 첫날부터 발인까지를 지켰던 사람이 고작 여섯명이었다는 현실에 직면해서부터이다. 그 이후 그는 가만히 누워 돌덩이같은 삶을 살아왔다. 스스로도 알 수 없었던 그 무엇은 무엇이었을까. 초라한 동료의 장례식을 보면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했지만, 결국은 하지 못했다.'는 체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이 두 사람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소설에서 최이정의 아들 정수환은 두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어머니의 개명에 필요한 서류 때문에 인터넷에서 외할아버지의 행적을 찾다 만난 사람이 바로 김명국 노인이다. 그러나 아들은 개명 서류를 들고 어머니가 일하는 공장에 들렀다 나오다 사고로 의식불명상태에 빠지고 만다. 정수환은 김명국 노인과의 만남을 통해 어머니가 그렇게 걱정하던 연좌제가 이 가족이 감내해야 할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는지도 모른다. 김명국 노인을 통해 찾아낸 외할아버지 최근식은 바로 김명국 노인의 강동정치학원 동기이자 김명국 노인에게는 배신자로 기억되는 인물이었다. 추측컨대 어머니의 이름 '최이정(崔而丁)'은 동료를 배신한 외할아버지의 속죄의 의미이거나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순간적으로 거둬들여야 했던 양심에 대한 참회의 의미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수환 학생에게 '걱정하지 마라, 넌 연좌제에 걸릴 염려 따윈 하지 않아도 될 거다. 하지만 개명은 꼭 해라. 어디서 감히 그런 이름을……'하면서 화를 냈소. 내가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야기도 다 꺼내고……그 친구가 교도소로 보낸 편지 이야기까지 하면서 비아냥거리기도 했소. 나는 내가 돌덩이가 되었다고 믿었는데……사실 그건 내 착각이었던 것 같소. 돌덩이가 된 것은 내 상처지, 내 마음은 아니었던게요……"

 

소설은 사문화되었지만 여전히 관행처럼 개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연좌제와 양심을 지키며 사는 삶들이 삐딱한 시선으로 매도되고 왜곡되는 현실을 이름에 얽힌 과거를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부정선거 의혹이 엉뚱하게 '종북논란'으로 비화되는 현실을 보면서 민주주의 원칙들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다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부처는 명전기성(名詮其姓)이라 하여 '이름에 모든 것이 있다'고 했다. 어느 누구도 이름을 허투루 짓지는 않을 것이다. 이름대로 사는 삶, 그것 또한 양심을 지키며 사는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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