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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한국인의 용기와 역량을 드러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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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근찬(1931년~2007년)의 <수난 이대>/1957년

 

<붉은 수수밭>으로 유명한 중국의 소설가 모옌(본명은 관모예, 1955년~)은 이 소설을 두고 "부자(父子)가 서로 합치면 하나의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생각은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 정신과 물질 면에서 모두 성공적인 한마당을 복구해낸 한국 인민의 용기와 역량을 드러낸다."는 감상평을 남겼다. 모옌은 일제의 강제침탈과 연이은 한국전쟁이라는 재앙을 딛고 짧은 시간 안에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룩한 한국을 한 쪽 팔이 없는 아버지가 한 쪽 다리가 없는 아들을 업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이 소설 속 마지막 장면에서 발견했는가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읽어봤을 하근찬의 소설 <수난 이대>의 마지막 장면은 이 대에 걸친 가족의 수난사(史)를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살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저자 하근찬에 대한 장황한 설명은 분명 사족(蛇足)일 터, 누구나 알았을 수도 있고 처음 듣는 얘기일 수도 있는 정보를 하나 덧붙이자면 우연히 길을 가다 자신을 '아가씨'로 불러준 총각 선생님에게 운명적인 첫사랑을 느끼게 된 산골 소녀의 순박한 사랑을 그린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이 하근찬의 소설 <여제자>가 원작이라는 것. 민족 수난사에 천착했던 저자가 이런 풋풋한 사랑 이야기도 썼다니 언젠가 이 소설도 들춰볼 날이 있으리라. 소설 <여제자>에 대한 궁금증은 여기서 접고 다시 <수난 이대>로 돌아가 보자.

 

 

소설 <수난 이대>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민족적 아픔을 가족 수난사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남양군도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비행장 건설사업에 투입되어 강제노동을 하던 중 다이너마이트 폭파사고로 왼쪽 팔을 잃은 아버지 박만도와 한국전쟁에서 수류탄에 맞아 한 쪽 다리를 잃게 된 아들 진수의 상봉 장면은 읽는 이의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소설은 마치 이 부자의 비극을 예고라도 한 것처럼 박만도의 신세한탄에 복선을 깔아놓는다. 

 

삼대독자가 죽다니 말이 되나. 살아서 돌아와야 일이 옳고말고. 그런데 병원에서 나온다 하니 어디를 좀 다치기는 다친 모양이지만, 설마 나같이 이렇게야 되지 않았겠지. 만도는 왼쪽 조끼 주머니에 꽂힌 소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그저 소맷자락만이 어깨 밑으로 덜렁 처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상 그쪽은 조끼 주머니 속에 꽂혀 있는 것이다. 볼기짝이나 장딴지 같은 데를 총알이 약간 스쳐갔을 따름이겠지. 나처럼 팔뚝 하나가 몽땅 달아날 지경이었다면 엄살스런 놈이 견뎌냈을 턱이 없고말고. 

 

기차 플랫폼에서 진수를 본 만도의 첫마디는 모질게도 "에라이 이놈아."였다. 양쪽 겨드랑이에 지팡이를 끼고 서 있는 진수의 한 쪽 바짓가랑이가 스쳐가는 바람결에 힘없이 펄럭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 현실에 마주선 여느 아버지의 첫마디도 이랬을 것이다. 이 말은 아들에 대한 원망이기도 하거니와 비참한 현실과 이런 현실을 가져온 질곡된 역사에 대한 작은 항변인 것이다. 이 부자가 살아갈 미래는 생각만 해도 참담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저자는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눕고 마는 풀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처럼 민초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믿는다.

 

"차라리 아부지같이 팔이 하나 없는 편이 낫겠어예. 다리가 없어노니 첫째 걸어댕기기가 불편해서 똑 죽겠심더."

"야야, 안 그렇다. 걸어댕기기만 하면 뭐 하노. 손을 제대로 놀려야 일이 뜻대로 되지."

"그럴까예?"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집에 앉아서 할 일은 니가 하고, 나댕기메 할 일은 내가 하고, 그라면 안되겠나. 그제?"

 

박만도가 아들 진수를 업고 외나무다리를 조심조심 건너는 장면은 전쟁의 폭력성과 잔학상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전쟁에 대한 어떤 객관적인 묘사도 없이 전쟁의 참혹성을 이렇게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저자 하근찬 소설의 매력이 아닌가 한다. 또한 비극의 상징적 묘사는 결코 현실에 굴복할 수 없는 이 부자 더 나아가 참담한 역사를 살아가야만 하는 민초들의 저항과 희망을 동시에 표현해내고 있다.

 

 

그러나 최근 며칠 사이에 접한 충격적인 뉴스는 박만도와 진수 부자의 수난사가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과거사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없는 일본과 군사협정을 체결하겠다는 것이다. 밀실에서 추진해오다 마지막 협정 서명을 앞두고 알려지면서 국민적 저항에 부딪치자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충분한 여론수렴 과정없이 추진할 일이 아니었다며 국무위원들을 질타했다는 보도는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무능한 것인지 책임 떠넘기기인지 수난의 역사가 위정자들의 무지와 무능, 천박한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한편 지난 5월24일에는 대법원에서 일제시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하면서 일제의 불법행위에 따른 피해를 보상받을 길이 열리긴 했지만 여전히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로 아니 적극적인 지원에서 한 발 빼는 태도를 보이면서 여전히 앞날은 불투명해 보인다. 모옌이 <수난 이대>를 두고 '한국인의 용기와 역량을 드러낸 소설'이라고 극찬했다지만 당당한 가해자 일본과 달리 피해자이면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한국의 위정자들이 있는 한 수난의 역사가 언제 마침표를 찍을지 암담하기만 하다. 

 

소설 <수난 이대>의 마지막 문장에서 용머리재가 지켜보고 있는 것은 박만도가 아들 진수를 업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광경만은 아닐 것이다.

 

눈앞에 우뚝 솟은 용머리재가 이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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