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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노동자 창선의 손바닥에는 소 우(牛)자가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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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야의 <과도기>/1929년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온 이 땅/
우리의 노동으로 일떠세운 이 땅에/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저 지하 땅끝에서 하늘 꼭대기까지/우리는 쫓기고 쓰러지고 통곡하면서/온몸으로 투쟁한다 피눈물로 투쟁한다/이 땅의 주인으로 살기 위하여 -박노해의 시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중에서-

박노해 시인만큼 우리 노동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작가도 없을 것이다. 개발이라는 명분 하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 그 사람들을 유혹하는 공단의 불빛산업역군이라는 권력과 자본의 달콤한 말에 하루가 멀다 하고 강행하는 잔업과 철야, 잘도 도는 미싱에 벌집이 돼버린 손가락, 그러나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건 개 돼지만도 못한 처참한 생활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시름시름 앓다가 차가운 쪽방 한 켠에서 맞이하는 죽음…’얼굴없는 시인박노해가 전하는 우리의 노동현실은 상상 이상이었다.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의 실체를 세상에 알렸다면 박노해는 노동자 스스로 이 땅의 주인임을 선언하고 권력과 자본에 맞서 조직화하고 세력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전태일과 박노해로 대표되는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설야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가 비록 소설가요 평론가이기는 했지만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미약했던 일제 강점기 시절 이미 노동현실에 대한 고민을 했었다면 그를 역사라는 무대로 불러들여야 마땅하지만 월북작가라는 또 하나의 슬픈 역사가 그를 동여매고 있다. 그의 이력을 짧게 소개하면 본명은 한병도다. 카프의 맹원으로 활동하다 월북하여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등의 고위직을 두루 거쳤으나 숙청당했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버림받은 대표적인 지식인 중 한 명이 한설야가 아닐까?

 

한설야의 소설 『과도기』는 1920년대 평화롭던 어촌 마을이 공단지역이 되어가는 과정과 그 속에서 노동자가 되어야만 했던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과도기란 제목처럼 작가 한설야의 고민이 농촌의 빈궁문제에서 노동문제로 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백 년 가까운 세월을 두고 권력과 자본의 얼굴은 얼마나 변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그대로다. 세월이 무색하다. 소설 『과도기』가 그려내는 그들의 얼굴은 이렇다. 

 

평범한 어부의 삶을 살았던 창선은 간도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 창리로 향하고 있다. 아내와 자식까지 있던 그는 왜 간도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구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걸까?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그들이 몰고 온 자본주의의 바람 때문이었다. 목선이 활개를 치던 바다는 어느 날 발동선이 바다의 주인으로 등장했고 돈 가진 사람과 일본 사람의 큰 배가 그의 삶의 터전인 바다를 잠식해갔다. 어쩔 수 없이 땅을 일구게 됐고 그나마도 쪼들린 살림을 이기지 못하고 간도로 떠났다. 간도에서의 삶은 고향에서의 그것보다 더 비참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고향만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찾은 고향이었지만 예전의 그 자리는 온데간데 없고 흰옷 입은 노동자들만이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구수한 흙냄새와 맑은 동해바람이 풍기던 옛 마을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맵짠 쇠냄새 나는공장과 벽돌집들이 거만스럽게 배를 붙이고 사람을 깔보고 있는 것이다. -『과도기』 중에서

 

창선의 고향 창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작가 한설야는 창리가 공단이 되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권력과 자본의 기만과 횡포를 창선과 창선의 형 창룡의 대화를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창리에 일본에서 가장 크다는 기업의 화학비료공장이 들어서면서 일제와 그들의 앞잡이인 읍내 유력자들은 갖가지 장미빛 청사진을 들이밀고 창리 사람들을 구룡리로 이주시키게 된다.

 

이리로 옮기기만 하문 여게다 인천만한 항구를 만들어주고, 시장, 학교, 무슨 우편소니,큰길이니 다 해준다고 떠벌리고또 야단스러운 지도를 들고 와서는 구룡리를 가리키며 제2의 인천을 보라구산 눈깔 빼먹을 놈들이야…” -『과도기』 중에서-

 

이렇듯 구수한 풍설에 강제로 이주한 구룡리는 정말로 제2의 인천이 되었을까? 천만의 말씀.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자본의 비열함은 변한 게 없다. 흉내만 낸 방축으로 동네 배들은 힘없이 부서졌고 어쩔 수없이 이웃 동네인 서호에서 명태를 받아오면 한 바리에 사 원은 더 주어야 하고 그나마 서호로 통하는 수렛길도 없었다. 도청이고 회사에 항의를 해보았건만 들어줄 리 만무했다.

 

축항인지 무언지 도청에서 설계를 했으니 회사는 모른다. 회사는 그대로 했을 뿐이다. 하고 모르쇠를 댄단 말일세. 그래 오늘은 도장관 있는 데로 몰려갔네. 그런데 도 장관은 꼴도 볼 수 없고 웬 년의 새낀지 코앞에 송충이 같은 수염이 붙은 놈이 나와서 덮어놓고 돌아가라구만 하지 않겠나.” -『과도기』 중에서-

 

강산이 열 번은 변했을 세월인데도 권력과 자본의 속성은 늘 그대로라니 놀라지 않을 수없다. 고향에 오면 아무 일이라도 해먹으려니 했던 창선에게 남은 선택이라곤 없었다. 비료회사공자 노동자로 사는 길밖에…. 직공시험을 치르고 합격한 다음 날부터 상투를 자르고, 감발 치고, 부삽 들고 콘크리트 반죽하는 생소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작가 한설야의 고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직공시험을 치른 창선의 손바닥에는 합격을 의미하는 푸른 글자가 찍혀 있었다.

 

그것은 분명 소 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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