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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홍염' 그는 왜 사위를 죽여야만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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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해의 <홍염>/1927년

신경향파 문학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
. 1919 3.1운동을 기점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작가들이 기존의 관념적이고 퇴폐적이며 유미적인 문학 대신 현실에 바탕을 둔 문학 운동을 기치로 출발했다. 그러나 과도기적 문학 운동의 한계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무엇보다 사회 불평등과 억압 구조 등에 대한 사회구조적 관점보다는 현실 고발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의 행동은 늘 돌출적이고 충동적이다. 계급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다보니 소설의 결론은 살인이나 방화, 자살 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최서해의 『홍염』은 신경향파 문학의 특징들을 두루 갖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탈출기』에서는 주인공이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면 『홍염』에서는 계급의식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완전한 자각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개인에 대한 복수에 그치고 마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떠난 간도, 그곳은 주인만 바뀌었을 뿐 소작 농민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 없다. 결국 주인공인 문서방은 빚 대신 딸 룡녜를 지주인 인가에게 빼앗기고 만다. 사람들이 보는 문서방과 인가의 관계는 장인과 사위다. 힘에 의해 살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가족 아닌 가족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간도에 대한 묘사에서 당시 간도로 이주한 소작농민들이 겪어야만 했던 시대적 아픔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렇게 교대적으로 산봉우리의 눈이 들로 내리고 빙판의 눈이 산봉우리로 올리달려서 서로 엇바뀌는 때면 그런대로 관계치 않으나, 하늬와 강바람이 한꺼번에 불어서 강으로부터 올리닫는 눈과 봉우리로부터 내리닫는 눈이 서로 부닥치고 어우러지게 되면 눈보라와 바람소리에 빼허의 좁은 골짜기는 터질 듯한 동요를 받는다.’ -『홍염』 중에서-

 

조선땅에서야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만 견디어내면 되었지만 간도에서 겪어야만 하는 조선민중들의 삶은 여기에 중국인 지주의 횡포까지 더해지니 마치 하늬 바람과 강바람이 동시에 불어 닥치는 꼴과 다름없었다.

 

주인공 문서방이 보여주는 현실에 대한 분노는 다분히 이중적인 성격을 띤다. 딸을 빼앗겼지만 인가가 준 땅이나마 있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딸이 떠난 이후 시름시름 앓고 있는 아내를 위해 마지막으로 딸 얼굴이나 보여주려고 인가를 찾아갔지만 결국 인가가 손에 쥐어준 돈 몇 푼을 못 이기는 척 받고 만다.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자본의 힘에 계급의식은 여전히 미천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소설이 끝나는 지점까지 불평등과 착취와 억압에 관한 사회구조적 고민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결국 그는 남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싫지만 인가를 사위로 인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더러운 놈의 더러운 돈을 받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지금 부쳐먹는 밭도 인가의 밭이다. 잠깐 사이 분과 설움에 어리어서 퇴기던 돈은-돈힘은 굶고 헐벗은 문서방을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못 이기는 것처럼 삼백 조를 받아넣고 힘없이 나오다가’ -『홍염』 중에서-

 

문서방의 분노와 복수는 아내의 비참한 죽음을 보고서야 행동으로 이어진다. 인가의 집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온 인가를 죽이는 것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그동안 억압구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던 문서방으로서는 다분히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방화와 살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초점도 문서방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 기쁨! 그 기쁨은 딸을 안은 기쁨만이 아니었다. 적다고 믿었던 자기의 힘이 철통 같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자기의 요구를 채울 때 사람은 무한한 기쁨과 충동을 받는다.’ -『홍염』 중에서-

 

문서방이 딸을 찾기 위해 방화와 살인을 하는 장면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긴장감이 흐르고  잔인하기 그지없다. 낯선 그림자의 등장과 베일을 벗는 그림자가 문서방에서 인가와 딸, 문서방과 딸을 거치면서 조명이 켜지고 클로즈업되는 효과를 연상시킨다. 도끼라는 설정은 사뭇 소름이 돋는다. 분노와 복수를 향한 표현의 깊이가 아니었을까?

 

신경향파 작가들이 보여준 자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그들은 새로운 문학을 개척했고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투쟁의 길을 열었다는 점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던 것은 다름아닌 조선탈환을 목적으로 한 무장독립투쟁이었으니 말이다.

한편 해방 공간에서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은 그들이 간도에서 겪었던 이중고 이상으로 뼈아픈 기억이 되고 만다. 그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문학은 폄하되었고 그들의 처절한 독립투쟁은 역사의 뒤안길로 내몰리고 말았다. 최근에야 그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일부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홍염(紅焰), 홍염은 붉은 불꽃이다. 억압하는 자에 대한 분노이고 탄압하는 자를 향한 복수이다. 또 신경향파 작가, 최서해 자신의 사상에 대한 표현이다. 비록 불꽃같았던 그들의 고민과 삶이 외눈박이 세상에 의해 지금은 꺼져가는 불씨가 되고 말았지만 그 불씨에 가벼운 바람이라도 불어넣어줄 의무가 있다면 이는 독자와 남은 자의 몫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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