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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25 우리는 무시하는 기록의 힘 (15)

대통령의 욕조/이흥환 지음/삼인 펴냄

 

2009년 3월, 워싱턴에서 열린 내셔널 아카이브(National Archives) 설립 75주년 전시회장. 네 명은 너끈히 들어갈 만한 커다란 욕조와 빛바랜 편지 한 장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끈다. 대형 욕조는 180센티미터에 달하는 키에 몸무게가 150킬로그램이나 되어 거구로 이름을 날린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의 것이다. 파나마 운하에 타고 갈 노스캐롤라이나 호 안에 설치했던 대통령의 욕조와, 그 욕조의 제작을 요청하는 주문서다. 무려 100년 동안 빛바랜 문서를 하찮게 여기지 않고 잘 보관한 나라, 그 나라가 바로 가장 많은 정부 기록을 남기는 나라 미국이다.

 
미국은 이렇게 아주 사소한 것까지 기록으로 남기는 나라다. 그들은 기록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정부가 한 일을 써 놓은 게 국가 기록이다. 국가가 기록을 남겨 놓지 않으면, 즉 정부가 한 일을 적어 놓지 않으면, 정부가 한 일을 국민이 점검(inspect)할 방법이 없다. 그 이야기를 남겨 놓지 않으면, 관료나 기관이 자기네가 한 일을 검토해 볼(review)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재임 기간에 남긴 기록을 대량으로 파기하는 우리와는 상황이 판이하게 다르다.


이번에 도서출판 삼인에서 나온 책<대통령의 욕조: 국가는 무엇을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가>는 기록(記錄)을 주제로 다룬다. 여러 종류의 기록 중에서도 국가 기록이다. 학술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한 주제인데,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책으로 엮었다. 237세밖에 되지 않은 젊디젊은 나라지만 국가 기록에 관한 한 어른 노릇을 하고 있는 미국을 그 견본으로 삼는다. 미국의 국가 문서 창고인 내셔널 아카이브(National Archives) 이야기다. 저자가 10년 넘게 내셔널 아카이브를 들락거리면서 얻어듣고 넘겨다보고 뒤져 본 것들을 한데 모았다. 

 

▲대통령의 욕조 


내셔널 아카이브의 정식 명칭은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이다. 장소를 나타내는 ‘국가 기록 보관소들(NationalArchives)’과 업무 내용을 표현한 ‘기록물 관리(Records Administration)’라는 두 개념을 합친 말로, 곧이곧대로 옮기면 ‘국가 기록물 보관 및 관리소’라는 뜻이다.

 
NARA에는 아카이브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1935년 워싱턴 시내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낸 ‘아카이브 I’과 1994년 메릴랜드 주 칼리지 파크에 설립된 ‘아카이브 II’가 본부 구실을 하고, 역대 대통령이 대통령 기록물을 모아 놓은 열세 곳의 ‘대통령 도서관’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여 있으며, 연방정부의 행정문서를 모아 놓은 ‘연방기록물센터(FRC, Federal Records Centers)’도 미 전역 열일곱 곳에 흩어져 있다. 크게 보아 내셔널 아카이브라는 한 지붕 밑에 세 식구가 동거를 하는 셈이다. 아카이브라는 낱말에 복수형을 쓴 것은 이 때문이다.


내셔널 아카이브의 문서고에는 90억 장에 가까운 문서가 들어차 있다. 문서만이 아니다. 1900만 장의 사진과 640장의 지도, 총 36만 릴(reel)에 달하는 마이크로필름, 11만 개가 넘는 비디오테이프……. 게다가 이 또한 어림잡은 추산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400개가 넘는 연방정부 기관이 하루에 억 단위의 문서를 생산해 내고 있고, 아카이브 문서고에는 아직 뜯어보지도 못한 문서 상자 속에 2억 장 가량 되는 문서가 남아 있다. 아카이브 II에 걸린 현판처럼 내셔널 아카이브는 “미국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A Prologue for America)”이다.

내셔널 아카이브는 어디까지 기록할 수 있고, 어떤 것까지 보관하며, 얼마만큼이나 공개하는지를 보여 준다. 미국의 국가 기록 시스템은 이렇게 세 개의 기둥 위에 서 있다. 기록과 보관, 공개가 바로 그것이다. 기록의 시작은 적어 놓는 것이다. 써 놓지 않으면 기록은 없다. 잘한 일뿐 아니라 잘못한 일도 적어야 한다. 써 놓은 것은 보관해야 한다. 보관되지 않은 자료는 기록물이 될 뻔했으나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지 못한 폐기물일 뿐이다. 보관해 둔 것은 다 같이 볼 수 있어야 한다. 행여 남이 볼 새라 창고 속에 숨겨 놓기만 하는 것은 기록물이 아니라 장물이다. 써서, 남겼다가, 보여 주는 것. 이것이 기록이다.

 

 


세계 질서의 슈퍼 파워이자 세계 경찰 노릇을 자처하는 미국은 비밀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는 체제다. 문서의 비밀 지정은 1급 비밀(Top Secret), 2급 비밀(Secret), 3급 비밀(Confidential) 이렇게 세 가지지로 되어 있다. 일단 비밀 지정된(classified) 문서가 비밀 해제(declassified)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규정상 일정 기간(25년)이 되어 자동으로 비밀 해제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해제 여부를 검토한 후 해제시키는 것이다. 비밀 해제냐 아니냐 하는 기준은 결국 한 가지, 국가 안보다. 행정 편의주의와 정부 비밀주의는 어느 나라든 예외 없이 비슷하다.


그러나 미국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국가 기록의 진짜 소유주가 국민임을 잘 알고 있다는 것. 그래서 미국은 어느 국가 못지않게 정보 공개에 저만큼 앞서 가는 체제다. 알 권리를 주장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도 늘 떳떳하고 당당하다. 내셔널 아카이브의 문턱도 낮다. 국립 문서고라고 해서 현관에 묵중한 철문이 달려 있는 요새 같은 곳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비밀스러운 곳도, 범접하기 어려운 곳도 아니다. 공공 도서관 가듯이 그냥 들어가면 된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열려 있는 곳이다. 미국인뿐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아카이브를 찾아와 문서를 뒤진다. 아카이브 또한 기록물 열람에 관한 한 외국인과 자국민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

 


내셔널 아카이브에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국가에 관해 기록한 문서가 쌓여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을 빼놓고는 한국 현대사를 제대로 풀어 갈 수 없다. 이 책은 내셔널 아카이브에서 찾은 한국 관련 문서 59건을 소개한다. 한국전쟁과 그 이전 또는 그 이후를 기록한 문서들이다. 문서 사진과 함께 각 문서마다 짤막한 설명문도 곁들였다. 내셔널 아카이브의 문서 색인도 영문 그대로 옮겨 적었다. 이 출처 정보만 있으면 누구든 내셔널 아카이브에서 문서 원본을 열람할 수 있다.

 


내셔널 아카이브는 군사, 외교, 정치 분야의 문서만 문서 대접을 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이 책은 이승만, 조봉암 등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나오는 문서도 소개하지만, 28세 농사꾼 아낙의 조선인민군 입대 청원서라든가, 어느 인민군 병사의 낡은 사진첩을 소개하기도 한다. 특히 미국인들은 전쟁이 기록 싸움이라는 것을, 기록의 싸움이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인의 시각에서 본 한국전쟁이 모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책에서 뽑은 문서들은 미국이 한국의 어느 구석까지 기록하고 있고, 어떤 문서까지 보관하고 있으며, 얼마만큼이나 공개해 놓았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본보기가 될 만한 것들이다.

 
저자 이흥환은 “기록을 이렇게까지 하는 나라도 있구나, 기록을 이렇게 대접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이런 걸 기록이라고 하는구나 ─ 뼈저리게 느낀 것들을 한 번쯤은 꼭 써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정보를 기록하지도 않고 보관하지도 않고 공개하지도 않고 꽁꽁 붙들고 있는 정부, 그리고 안보· 군사· 외교 정책이나 역사적인 주요 사건의 내막을 기록해 놓은 ‘큰 문서’만 대접하고 시민들의 생활상이 드러나는 ‘작은 문서’는 외면하는 연구자들……. 이 책이 기록에 관한 한국인들의 인식에 작은 변화를 주길 기대한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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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강여호 트랙백 29 :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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