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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세계명작단편소설

속내를 숨기며 사는 현대인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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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호 사절/호시 신이치(星 新一, 1926~1997, 일본)

 

정체불명의 괴물체가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다른 별의 우주선이 틀림없다. 전 지구가 혼란에 빠졌다. 다른 별에 우주선까지 보낼 정도면 지구보다 훨씬 발달된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음은 여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건 침략이다. 그렇다면 섣불리 맞서 싸운다면 오히려 지구인의 피해만 더 커질 것이다. 지구는 선택해야만 한다. 싸울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 그렇다고 항복하자니 지구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결론은 하나다.  환영해주는 척 하면서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당신이 외계인과 조우한다면……

 

호시 신이치의 소설 <우호 사절>은 정체불명의 괴물체, 즉 외계인이 우주선을 몰고 지구를 향해 접근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쇼트―쇼트' 즉 초단편소설이다. 물론 지구 이외의 별에도 생명체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여부는 현재의 과학 수준으로는 밝혀내기 힘든 호기심의 문제다. 그렇다고 외계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에는 인간의 지나친 자만과 오만의 발로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소설에 따르면 3일 후면 외계인이 탄 우주선은 지구에 도착할 것이다. 수 천년 동안 쌓여진 지구인의 지혜는 환영해주는 척 하면서 놈들을 멋지게 골탕 먹이겠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드디어 거짓 환영위원회를 꾸린다.

 

 

"환영위원회 여러분, 여러분의 어깨에 인류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류의 대표로서 외계인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쪽에서 어떤 녀석이 나와 이상한 짓을 하더라도 화를 내거나 이성을 잃거나 경멸하거나 당황하지 말아 주십시오. 끝까지 정중하고 차분하게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호 사절> 중에서-

 

세째 날 우주선이 착륙하고 외계인이 정체를 드러냈다. 환영위원들은 최대한 예의를 갖춰 외계인들에게 환영 인사를 건넨다. 머리와 다리 사이에 긴 몸통을 가지고 있는 외계인들을 마주한 환영위원들은 환영 인사와는 달리 속으로는 '앗, 저런 모습이라니! 징그러운 놈들', '빨리 꺼져 버려라' 하며 경멸적인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수 천년 동안 쌓아왔다던 지구인의 지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밑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외계인들은 지구인보다 훨씬 더 발달된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지구인의 겉과 속을 알아낼 수 있는 최첨단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인은 왜 속내를 숨기며 살까?

 

환영위원들의 얄팍한 속내를 알아차린 외계인이 내린 결론은 지구인은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자기들과는 반대라는 것이다. 즉 지구라는 별에 사는 생물체들은 화가 날 때는 웃고, 아플 때는 간지럼을 태우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외계인들은 지구인들의 방식대로 그들의 감정을 표현하기로 한다. 사실 외계인들은 지구라는 별과 우호를 다지기 위해 왔다. 외계인은 우호에 가득 찬 진심 어린 마음으로 지구인들을 향해 메세지를 낭독한다.

 

"이놈들아, 이렇게 찾아와서 유감이다. 이 너저분한 원숭이 같은 놈들. 잘나지도 않은 상판대기를 하고 나란히 서 있는 네놈들 꼴도 보기 싫다. 이놈 저놈 가리지 말고 죄다 냉큼 죽어 버려라!" -<우호 사절> 중에서-

 

이 쯤에서 웃음이 터지고 말지만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고 만다. 뒷 이야기를 상상하면 더 큰 웃음이 쏟아질 법도 하지만 이내 씁쓸함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자만과 오만으로 가득 찬 지구인의 지혜는 둘째 치고 소설 속 외계인을 대하는 지구인의 태도가 마치 현대인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서다. 어쩌면 현대인의 슬픈 민낯인지도 모르겠다. 각박해지는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갈수록 속내를 숨기며 사는, 그래야만 현명한 삶이라 믿는 현대인에게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것은 비단 필자가 느끼는 감정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왜 자기를 숨기며 고독한 삶에 빠져드는 것일까?

 

상대를 믿지 못하기 선뜻 나를 드러내놓지 못한다.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정치인들의 거짓말은 굳이 논할 가치조차 없다. 더 큰 문제는 상대를 밟고 서야만 내가 생존할 수 있는 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체제와 시스템이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는 이런 야만적인 시스템을 고착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현대인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었다는 문명의 이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해 주는 데는 턱없이 모자라는 한계에 봉착해 있다. 무심코 노출시킨 개인 정보는 광범위하게 범죄에 이용되고 있다. 누구도 자신을 드러내 놓고 살 수 없는 사회에 도달한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와 사회의 관심이 이런 현대인들을 안심시켜 주지도 못한다.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지만 결코 더불어 살 수 없다는 믿음만이 현대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우호 사절로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들에게 겉과 속이 다른 행태를 보인 지구인들의 행동에서 속내를 숨기며 살아야만 하는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이 오버랩되는 것은 결코 지나친 상상이 아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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