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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세계명작단편소설

문명의 이기가 애물단지일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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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도로시 파커(Dorothy Parker, 1893~1967, 미국)/1930년

 

제발, 하느님, 그 사람이 지금 저한테 전화 좀 하게 해 주세요. 사랑하는 하느님, 저한테 전화 좀 하게 해 달라고요. 다른 부탁은 안 할게요. 정말이에요. 큰 부탁도 아니잖아요. 힘든 일도 아니에요. 하느님한테는 아주 하찮은 일이니까요. 그냥 전화만 하게 해 주면 돼요. 네? 제발요, 하느님. 제발요, 제발, 제발. -<전화> 중에서-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이 여자. 무척이나 초조해 보인다. 그저 전화만 기다리는 게 아닌가 보다. 전화가 오면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도대체 갈피를 잡지 못한다. 500까지 다 세기 전에 받지 말아야지 하면서 숫자를 헤아려 보지만 얼마 못가 다시 '제발 좀 울려라' 하면서 아무런 반응도 없는 전화에 대한 원망을 토해낸다. 도로시 파커의 단편소설 <전화>는 사랑을 확인받으려는 한 여자의 복잡한 심경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언뜻 이 여자의 심리 상태가 이해하기 어려운 듯 하지만 사랑의 감정을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잣대로 재단하거나 정의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고 보면 이 여자의 행동이 그렇게 이해하지 못할 수준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사랑에 대한 이 여자의 복잡한 성격은 '전화'라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 폭로된다. 그야말로 문명의 이기가 애물단지가 아닐 수 없다. 

 

▲사진> 구글 검색 

 

'전화하겠다'는 남자의 말을 '사랑한다'는 말로 받아들인 여자의 심리는 전화기 앞에서 변덕스럽기 그지 없다. 사랑에 빠진다고 누구나 이러지는 않을건대 그렇다고 여자를 비난하기에는 누구나 한번쯤 비슷한 경험들을 해보지 않았을까? 아마도 여자를 이렇게 만든 것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사랑이 집착이나 열등감으로 변해버린 까닭일 것이다.

 

그만두자. 이딴 식으로 해서는 안 돼. 생각해 봐. 젊은 남자가 여자한테 전화하겠다고 하고서 무슨 사정이 생겨 전화를 못한다고 치자. 그거 뭐, 큰일은 아니잖아. 그런 일, 어디서나 늘 일어나는 일 아냐?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전화> 중에서-

 

태연한 척 해보지만 이내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박살내 버릴 생각을 하고 하느님을 원망한다. 하느님의 지옥보다 자신의 지옥이 더 무서울 거라고 생각한다. 남자가 전화만 해 준다면 지금까지의 원망과 슬픔은 다 잊어버리겠다고 다짐한다. 급기야 여자는 남자가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까지 한다. 

 

아니, 죽어 버리면 좋겠어. 그런데 이거 너무 끔찍한 소원 아냐? 아냐, 근사한 소원이야. 죽으면 내 것이 되잖아. 그 사람이 죽어 버리면 지금 같은 순간이나 지난 몇 주일 동안 겪은 괴로움은 다시 생각나지 않을 거야. 좋았던 때만을 기억하겠지. 다 아름답게만 기억될 거야. 죽어 버리면 좋겠어. 제발 죽어 버려, 죽어, 죽어 버리라고. -<전화> 중에서-

 

집착도 이 정도면 중증이다. 문제는 사랑에 대한 집착이 열등감에서 온다는 것이다. 여자 스스로도 말한다. 진짜 자존심이란 자존심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여자는 사랑을 위해서 당당히 자존심을 버리겠다고 하느님 앞에 맹세한다. 그래서 여자가 먼저 전화를 해볼까 생각하지만 생각뿐이다. 만일 남자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결국 무작정 기다리는 수 밖에. 여자는 사랑의 진실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다시 숫자를 센다. '다섯, 열, 열다섯, 스물, 스물다섯, 서른, 서른다섯…….' 천천히 500까지 세고 전화가 안 오면 여자가 하겠다고 다짐한다. 이 여자, 아마 백발이 될 때까지 전화기 앞에서 이 고민과 다짐만 반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전화를 매개로 나의 자존감이 상실된 사랑에 대한 집착, 열등감을 실감나게 표현한 작가의 상상력도 대단하지만 전화 그 자체만으로도 집착의 대상이 된 현실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시대적 배경으로 보자면 소설 속 전화기는 선이 있고 전면에 커다란  숫자 다이얼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유선 전화기만으로도 분명 문명의 이기였을텐데,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전화는 이제 스마트폰이라는 이름으로 전화기 하나면 안 되는 게 없고, 못할 게 없는 세상이 되었다. 반면 '중독'이라는 표현이 나올만큼 전화기는 이제 사회 현상이자 사회 문제가 되었다. 결국 문명의 이기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애물단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집착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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