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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508호 남자가 쓰레기봉투를 뒤지게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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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의 <곰팡이꽃>/1998년

쓰레기 종량제가 시작된 것은 1995년 1월 1일이었다. 쓰레기의 배출량에 따라 수수료를 다르게 부과하는 쓰레기 종량제는 지정된 규격 쓰레기봉투를 판매하고 그 봉투에만 쓰레기를 버리도록 한 것이며 재활용이 가능한 쓰레기는 제외하여 쓰레기의 재활용률을 높이기 위해 시행되었다. 쓰레기 종량제가 처음 시작되던 당시에는 웃지못할 일들도 많이 있었다. 검정 봉다리(봉지)에 넣어 그냥 버리는 게 일쑤였고 동사무소에서는 검정 봉다리 속 내용물을 확인해서 과태료를 부과하기도 했고 규격 봉투가 아니면 수거해 가지 않는 바람에 골목 여기저기에는 쾨쾨한 냄새가 진동하기도 했다. 거의 정착단계인 요즘에도 이런 풍경은 종종 목격된다. 나도 가끔, 아주 가끔 검정 봉다리채 버린 적도 있다. 680원 하는 쓰레기 봉투값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가끔 쓰레기 분리가 귀찮을 때가 있다. 나도 민주시민은 아닌 모양이다.

삼광 아파트 508호 남자는 오늘도 일층 쓰레기통에서 누군가가 버린 쓰레기 봉투를 가져와서는 욕실에 풀어헤쳐놓고 뒤지며 무언가 열심히 메모하고 있다. KBS TV문학관에서도 소개되었던 하성란의 소설 <곰팡이꽃>은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된 이후 한 남자가 벌이는 괴이한 취미생활(?)을 통해 소통의 발전을 가져온 문명의 이기가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소통 부재의 원인이 되는 현대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하성란이란 작가를 소개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현미경처럼 세밀한 묘사'는 <곰팡이꽃>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가령 '흘러내린 바지와 오른팔 쪽으로 치켜 올라간 윗옷 사이로 드러난 맨살'이나 '콩깍지를 덮고 있는 가실가실한 솜털의 촉감과 콩깍지의 틈을 벌리느라 엄지손톱에 낀 섬유질'이란 표현에서 보듯이 오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려다 본 놀이터의 풍경은 마치 카메라 줌을 한껏 올린 것처럼 바로 눈앞의 풍경처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렇다면 소소한 일상마저도 허투루 지나치는 법이 없는 저자가 그린 소통 부재의 현대인은 어떤 모습일까. 508호 남자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서 쓰레기봉투 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진실의 실체를 파헤쳐보자.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남자

이 남자의 괴상한 취미는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된 이후 무심코 버린 '장터쇼핑 배달 가능'이라는 붉은 글씨가 띄엄띄엄 드러나 있는 봉투 때문이었다. 이 봉투 안에 든 수지침협회에서 보내온 우편물은 아파트 부녀회원들로 하여금 이 남자를 비양심적인 사람으로 낙인찍게 만들고 말았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남자를 수치스럽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회사 동료 여직원을 짝사랑했던 남자는 어느날 이 여직원이 다른 남자 직원과 부서를 돌아다니면서 청첩장을 나눠주는 것을 보면서 만취해서 새벽까지 쓴 편지를 부치지 못하고 이 봉투에 버렸던 것이다. 남자는 부녀회원들이 이 편지를 읽었을 거란 생각에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이 사건이 남자의 괴이한 취미생활의 원인이라고 단정하고 있지는 않다.

남자가 옆집인 507호를 드나드는 사내와의 일상은 풍자 코미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의 단편영화를 감상하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결별한 연인 사이로 보인 사내는 만나주지 않는 507호 여자에게 끊임없는 구애를 한다. 그러나 남자는 안다. 이들의 사랑이 다시 맺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남자는 507호 여자가 버린 쓰레기를 통해 그녀의 기호를 이미 알고 있지만 사내의 선물공세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507호 여자가 버린 쓰레기봉투에서는 체리와 파인애플, 귤만 골라먹고 버린 생크림 케이크가 딱딱하게 굳은 채 들어 있어고 지리산을 종주한 여자의 사진이 있었다. 그러나 사내 한 번쯤이라도 여자의 쓰레기를 훔쳐볼 수 있었다면 헤어지지 않았을 것을. 사내는 늘상 생크림을 선물하고 지난 여름 제주도로 같이 떠났던 휴가를 추억하고 있다. 

소통 부재의 현대인들

생각해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문명의 이기는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커뮤니케이션의 진보를 이룩해 왔고 지구 반대편 누군가와도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시대를 열어왔건만 정작 현대인들은 소통 부재로 고통받고 있으니 말이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된 아파트가 바로 소통 부재의 현실을 대변해 주는 상징적 매개체이기도 하다.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남자의 괴이한 행동은 소통을 갈구하는 현대인들의 왜곡된 소통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회학의 수법 중에 '가볼러지(garbology)'라는 게 있다고 한다. 어떤 지역의 쓰레기장을 조사해서 그 지역 사람들의 생활실태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언급된 것을 보면 저자도 '가볼러지'에서 문학적 영감을 떠올리지 않았나 싶다. '쓰레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쓰레기야말로 숨은그림찾기의 모범답안'이라는 남자의 생각은 삭막한 관계 속에서 제대로 된 소통 방식을 찾아내지 못한 현대 사회와 현대인들의 자화상일 것이다.

한편 쓰레기봉투를 뒤져 아파트 주민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간파하고 있는 남자를 보면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소통, 즉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 준 개인정보 유출의 심각성을 보게 된다. 어쩌면 남자의 행동은 고전적 의미의 개인정보 유출의 폐해라고 할 수 있겠다. 메일함을 열어보기가 무섭게 화면 가득 채워진 스팸 메일들을 보면 그렇다. 게다가 어떻게 알았는지 내 이름까지 떡 하니 언급된 스팸메일을 볼 때면 섬뜩함마저 느끼게 된다. 이렇게 불분명하지만 마치 나를 발가벗긴 채 광장으로 내쫓는 문명의 이기는 현대인들이 자꾸 음지로 숨게 하는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남자와 사내가 아파트 뒤뜰 무성한 풀숲에서 사내가 507호 여자에게 선물했던 돌하르방 인형을 찾으면서 마무리된다. 사랑의 진실을 알고 있던 남자는 생각한다.

도대체 알 수가 없다니까. 진실이란 것은 쓰레기봉투 속에서 썩어가고 있으니 말야.

'쓰레기봉투 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진실'이란 비단 사내와 507호 여자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사랑의 진실만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현대인의 소통 부재와 왜곡된 소통 방식을 '쓰레기봉투 속의 진실'로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오늘도 쓰레기봉투는 습한 공기 속에서 곰팡이꽃만이 무성하게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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