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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으로 본 청년실업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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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메이드 인생/채만식/1934년

청년실업이 날로 심각한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도 언론도 취업시즌에만 반짝 관심을 가질 뿐 강 건너 불구경이다. 2009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청년 인구 중 비경제활동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56%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청년 고용률은 외환위기 당시보다 낮은 수준이라고 하는데도 진지한 공론의 장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경제활동인구의 증가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도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정부의 눈높이를 낮추라느니, 중소기업에는 아직도 인력이 모자란다느니 하는 청년실업대책과 이를 받아쓰기에 급급한 언론의 태도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저렇게 취직만 하려고 애를 쓸게 아니야. 도회지에서 월급 생활을 하려고 할 것만이 아니라 농촌으로 돌아가서! 저게 다 모르는 소리야조선은 농업국이요, 농민이 전 인구의 팔 할이나 되니까 조선 문제는 즉 농촌문제라고 볼 수가 있는데, 아 지금 농촌에서 할 일이 오직이나 많다구?” -『레디메이드 인생』 중에서-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우리 대학생들과 청년들을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하는 허영심 가득한 부류로 전락시키는 꼴이다.

 

무얼 먹고 헌신적으로 그런 사업을 합니까?...먹을 것이 있어서 그런 농촌 사업이라도 할 신세라면 이렇게 취직을 못해서 애를 쓰겠습니까?...지금 조선 농촌에서는 문맹퇴치니 생활개선이니 합네하고 손끝이 하얀 대학이나 전문학교 졸업생들이 몰려오는 것을 그다지 반겨하기는커냥 머릿살을 앓을 겁니다.” -『레디메이드 인생』 중에서-

 

이도저도 안되면 집권자의 성공신화(?)를 들먹이며 과감히 도전하란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속편한 말로 비난의 화살을 피해가기 일쑤다.

 

그거야 성의 있게 하면 자연 돈도 생기는 거지” -『레디메이드 인생』 중에서-

 


내용보다도 제목이 너무도 익숙해 다 읽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소설,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은 1934 <신동아>에 연재되었다. 충격적이지 않는가! 소설 첫머리에 등장하는 K사장과 주인공 P의 대화가 마치 TV속 대통령과 이를 답답하게 바라보는 우리 청년들의 하소연처럼 들리니 말이다. 대책은 없고 훈계만 하는 대통령, 백 장도 넘는 이력서를 제출하고도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는 청년들, 이 시대 슬프디 슬픈 진풍경이다.

 

 

채만식은 근대 한국에 처음으로 풍자소설을 도입한 소설가이자 희곡작가다. 그의 자전적 소설이라고도 알려진 『레디메이드 인생』은 현실에 낙오되어 좌절한 지식인을 통해 당시 일제가 펼쳤던 문화정치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소설이다. 채만식 또한 근대소설을 언급할 때면 늘 어쩔 수 없이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친일행적에서 자유롭지 못한 작가 중 한 명이다. 작가로 데뷔한 초기에는 카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동반자적 입장에서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했으나 일제말기 친일로 돌아서 『여인전기』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고 다시 해방이 되고 나서는 자신의 친일행적을 반성하는 『민족의 죄인』을 발표하기도 했다.

 

레디메이드를 굳이 우리말로 바꾸자면 맞춤’, ‘기성품이 적당할 것 같다. 1930년대 제5대 조선총독으로 임명된 사이또 마꼬또(齎藤實, 1858~1936)는 무단정치를 지양하고 형식상의 문화정치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이는 조선민중의 교화를 빙자한 또 다른 회유책에 불과했다. 채만식은 자본주의와 결합한 일제 문화정치의 허구성을 레디메이드란 단어로 풍자하고 있다.

 

신흥 부르주아지는 민주주의의 간판을 이용하여 노동자, 농민의 등을 어루만지고 경제적으로 유력한 봉건귀족과 악수를 하는 동시에 지식계급을 대량으로 주문하였다. -『레디메이드 인생』 중에서-

 

주인공 P도 이 문화정치로 주문된 레디메이드 인생을 살고 있는 지식인이다.

 

인텔리인텔리 중에도 아무런 손끝의 기술이 없어 대학이나 전문학교의 졸업증서 한 장을, 또는 그 조그마한 보통 상식을 가진 직업 없는 인텔리해마다 천여 명씩 늘어가는 인텔리뱀을 본 것은 이들 인텔리다. -『레디메이드 인생』 중에서-

 

주문생산된 P가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수요와 공급이 적절한 균형을 맞춰야만 굴러가는 자본주의에서 어느 날 갑자기 대량생산된 레디메이드 인생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P도 주머니 구석에 돈 푼이나 있으면 털어 선술잔이나 먹고 하는 룸펜일 뿐이다. 일제는 그렇게 레디메이드 인생들을 양산해 냈다. 그들의 의도는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부르주아의 기성 문화 기관에 들어가자니 그곳에서는 수요를 찾지 아니한다. 레이메이드로 된 존재들이니 아무 때라도 저편에서 필요해야만 몇씩 사들여간다. -『레디메이드 인생』 중에서-

 

소설 마지막에서 채만식이 극단적인 설정을 통해 표현한 풍자는 일제 문화정치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주인공 P는 아홉 살 난 아들 창선을 XX인쇄소에 맡기고 혼자 중얼거린다.

 

레디메이드 인생이 비로소 겨우 임자를 만나 팔리었구나.” -『레디메이드 인생』 중에서-

 

일제가 대량으로 주문생산한 레디메이드 인생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면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권력의 필요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고급인력들을 양산해 내고 또 고급인력들간에 무한 경쟁을 부추기고 결국엔 그들이 필요한만큼만 거두어들이는 현실. 취업 낙오자는 인생 낙오자로 낙인찍히는 현실. 근본적인 대책은 외면한 채 K사장처럼 추상적인 말로 아니 너 자신을 알라며 훈계하는 현실. 이런 걸 두고 판박이라고 하지 않겠나!

 

졸업시즌이다. 이제 또 대한민국은 청년실업을 걱정(?)하는 권력과 언론이 만들어내는 소음으로 골머리가 지끈지끈해질 것이다. 아니면 또 쇼를 즐기는 권력의 XX행보들로 시청자들은 채널 선택권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일제가 펼쳤던 문화정치는 우민화 정책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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