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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목매이는 여자' 그녀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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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박종화의 『목매이는 여자』/「백조」3호(1923.9)/창비사 펴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박팽년, 유응부를 기억하는가? 이들은 어린 임금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수양대군, 세조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역사는 그들을 사육신(사六臣)이라 부른다. 사육신과 함께 또 기억해야 할 인물들이 있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이들은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관직을 거부하고 재야에 묻혀 살았다. 살아서 주군에 대한 충성을 다했으니 이들을 생육신(生六臣)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승자의 기록이라는 역사가 그들을 어떻게 기억했고 또 어떻게 기억하든 그들은 멋진 남자였다.

 

12명의 멋진 남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천재가 한 명 있다. 그는 7개 국어에 능통했고 관리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선보였으며 지도 제작에까지 참여했다고 한다. 이 뿐이던가! 그는 훈민정음 창제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신숙주(1417~1475).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하였던 그에게 변절자라는 꼬리표는 12명의 멋진 남자와 동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운명과도 같았다. 무려 6명의 주군을 섬겼다는 이유로 그의 천재성이 폄하될 수는 없을지언정 단 한 명의 주군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치고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었던 12명의 멋진 남자를 역사의 주인공으로 올려주는 명품조연임에는 틀림없다.

 

사육신과 생육신 그리고 신숙주을 알았다면 박종화의 소설 『목매이는 여자』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 보인다. 소설은 신숙주에게 또 한 번의 굴욕을 안겨준다. 12명의 남자를 위해 당신은 멋진 조연이 되어야 한다고 부르짖는 신숙주의 아내 윤씨 부인 때문이다. 윤씨는 대놓고 남편에게 말하지 않는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다. 관객들에게는 반전의 재미(?)까지 주는 쏠쏠함도 있다.

 

박종화의 역사 소설 『목매이는 여자』는 단 3일간의 기록이다. 신숙주가 역사 속 변절자로 낙인찍히는 고뇌의 시간과 이를 옆에서 바라봐야만 하는 아내 윤씨의 내적 갈등이 탁월한 심리묘사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지고 있다. 준다. 조카를 귀양보내고 피의 살육으로 집권한 수양대군 세조. 전 왕의 총애를 받았던 신숙주는 그가 패륜아요, 파렴치한으로 여겼던 새 주군 세조의 신하가 될 수 있을까? 윤씨는 남편의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군이충(事君以忠)과 일부종사(一夫從事)가 생명과도 같았던 이들 부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게다가 신숙주는 성삼문의 절친이 아니었던가!

 

목매려는 여자

 

신숙주는 세조의 협박에 굴복하고 만다. 신념을 지키자니 여덟 아들이 눈에 밟혔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끝내 자신의 변절을 털어놓지 못한다.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라도 했으면 좋았거늘 그는 자신이 없었다. 윤씨에게 남편 신숙주는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멋진 남자였으니 아내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남편의 배려라고 하기에는 그 결말이 너무도 비참했다.

 

사육신이 갖은 고문 끝에 형장으로 가던 이튿날, 윤씨는 확신했다. 그 행렬 중에 남편도 있을 거라고. 그 행렬의 선두에 남편의 오랜 벗, 성삼문이 있었으니 그의 확신은 더욱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남편과 자식들의 처참한 죽음을 뒤로 하고 관노가 되어야만 할 운명이라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편이 더 나았다. 길지 않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일사천리로 실행에 옮겨졌다. 이렇게 윤씨는 남편 신숙주를 역사 속 조연으로 끝없이 추락시키고 만다.

 

목매는 여자

 

단 한 쪽에 불과한 이 장면에서 기막힌 반전이 이루어진다. 냠편 신숙주가 찬란한 금관에 화려한 조복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남편의 죽음을 예감한 그에게 이보다 더한 기쁨이 있을까 생각했다면 이 소설을 너무 얕잡아 본 게 아닐까?

 

아이들 때문에-“

 

윤씨는 고개를 숙이고 입안엣말로 중얼거리는 남편이 끝없이 더러워 보였다. 사군이충을 말하던 남편의 입이 똥보다도 더 더러웠다. 급기야 윤씨는 남편의 얼굴에 침까지 뱉어버렸다. 여기까지 왔다면 결코 살아온 남편에 대한 기쁨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삼일 째 되던 날 아침, 높다란 누마루 대들보에는 윤씨가 기다란 허연 무명수건에 목을 걸고 늘어져 있었다. 신숙주가 이 소설이 주는 반전의 깊이만큼이나 더 이상 역사의 주연을 꿈꿀 수 없게 명토를 박아버린 것이다.

 

목매이는 여자

 

1920년대 매이다가 정확히 어떻게 사용된 단어인지 잘 모르겠다. 타동사로 쓰였는지 피동사로 쓰였는지나만의 해석을 덧붙일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는 것 같아 이 또한 재미다.

 

윤씨는 타살되었다. 사군이충과 일부종사라는 사회 통념에 의한 타살이었고, 아버지의 죄가 자식에게까지 미치는 연좌제에 의한 타살이었다. 윤씨의 죽음이 더더욱 슬픈 이유는 이런 사회적 타살 요인에 너무도 무기력했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해법도 고민하지 않았다. 그의 뼛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가치관에 그저 순응할 뿐이었다.

 

박종화의 『목매이는 여자』는 이후 이광수의 [단종애사]로 이어진다. 두 소설 모두 신숙주의 아내 윤씨의 자살을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정설은 아니다. 소설 속 설정일 뿐이다.

 

저자는 당시 지식인들이 조선과 일본 제국주의 사이를 넘나들었던 변절행각을 신숙주와 그의 아내 윤씨를 통해 고발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질 것 없는 지식인의 속물 근성이다. 전 정권에서 장관했던 사람이 새 정권의 품에 안겨 자신이 모셨던 대통령을 향해 저격수가 되는 현실이 아닌가! 민중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번지르한 기름 바르고 나타나 민중탄압의 선봉을 자처하는 현실이 아닌가!

 

분명한 것은 역사는 그들을 결코 주연으로 발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희대의 천재 신숙주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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