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화와 전설/그리스

가니메데 납치와 고대 그리스의 독특한 성 문화

반응형

그리스 신화에서 가니메데(Ganymede 또는 Ganymedes)는 트로이 출신의 신의 반열에 오른 인간이다. 호메로스는 가니메데를 가장 아름다운 인간으로 묘사하고 신들이 올림포스의 연회에서 제우스에게 술 따르는 일을 시키기 위해 가니메데를 납치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신화는 성인 남성과 사춘기 전후 소년 사이의 연애 관계인 페데라스티(Pederasty, 소년애)라는 그리스 사회적 관습의 사례이기도 했다. 가니메데의 로마 이름은 카타미토스(Catamitus)로 성인 남자의 연애 상대 미소년을 의미하는 카타마이트(Catamite)의 어원이 되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제우스가 ‘욕망’이라고 불리는 가니메데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가장 긴 저작이자 최후의 저작으로 알려진 <법률>에 따르면 크레타인들은 자신들의 비정상적인 쾌락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신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자주 비난을 받았다.

 

가니메데의 납치_렘브란트. 출처>구글 검색

 

그리스 신화에서 가니메데는 다르다니아의 트로스와 강의 신 스카만드로스의 딸 칼리로에 또는 에우메데스의 딸 아칼라리스의 아들이다. 참고로 고대 국가 트로이는 트로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에 따라 가니메데는 일로스, 아사라코스, 클레오파트라, 클레오메스트라의 형제다. 어떤 저자들은 그를 라오메돈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다른 저자들은 그를 일로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화에서 다르다노스, 에리크토니오스, 아사라코스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신화에 따르면 가니메데는 프리기아의 트로이 근처 이다 산에서 제우스에게 납치되었다. 가니메데는 특권적인 지위가 드러나기 전 양을 돌보는 등 소박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독수리가 그를 낚아채어 올림포스 산으로 데려갔다. 이 독수리는 제우스의 명령을 받은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때로는 제우스 자신이 변신한 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올림포스에서 제우스는 가니메데에게 영원한 젊음과 불멸을 부여하고 헤라클레스와의 결혼한 헤베(젊음의 여신)를 대신해 신들에게 술 따르는 일을 맡겼다. 하지만 자신의 딸 헤베가 이 일에서 쫓겨나자 헤라는 분노했고 가니메데에게 다양한 문제를 일으키도록 저주를 내렸다. 결국 제우스는 가니메데를 물병자리로 올려주고 그의 아버지 트로스에게는 신성한 말을 하사했다. 이제 올림포스 신들의 술잔은 헤베가 다시 따르게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가니메데 납치 스케치. 출처>구글 검색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따르면 헤베가 신들에게 술을 따랐다면 가니메데는 제우스 개인의 술잔을 담당했다. 독일의 민속학자 에드문드 베켄스테트(Edmund Veckenstedt, 1840~1903)은 가니메데를 프리기아에서 유래한 미드(벌꿀 술) 창조와 연관시켰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등 여러 문헌에서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가니메데를 남편의 애정에 대한 경쟁자로 간주한다. 다양한 이야기에서 제우스는 가니메데를 독수리자리 옆에 있는 물병자리 별자리로 하늘에 두었다. 독일의 천문학자 시몬 마리우스(Simon Marius, 1573~1625)는 목성의 가장 큰 위성을 가니메데로 명명했다. <일리아드>에서 제우스는 가니메데의 아버지 트로스에게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전달한 불멸자를 태운 말인 좋은 말을 선물로 보상했다. 트로스는 아들이 이제 불멸의 존재가 되었으며 올림포스 연회에서 신들의 술잔을 채우는 일을 할 것이라는 사실에 위로를 받았다.

 

플라톤은 신화의 기원을 페데라스티의 사회적 관습이 유래했다고 추정되는 크레타로 돌림으로써 신화의 동성애적 측면을 설명한다. 2~3세기 사이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자이자 문법가인 아테나이오스는 가니메데가 제우스 대신 전설적인 미노스 왕에게 납치되어 그에게 술을 따르는 역할을 했다고 기록했다. 일부 저자들은 이 신화를 스트라보(Strabo, BC 63~?,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와 에포로스(Ephoros, BC 400~BC 330,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가 기록한 크레타의 남색 관행과 동일시했다. 이 관행은 청년이 남성으로 사회에 다시 복귀할 수 있기 전 두 달 동안 나이 많은 애인에게 납치되는 일이 포함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 크세노폰(Xenophon, BC 431~?)은 가니메데가 제우스의 미동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대신 신이 그의 영혼을 사랑했다고 주장한 소크라테스의 말을 전하면서 가니메데의 어원을 ‘기쁨을 취한다’라는 의미의 ‘가누(Ganu)’와 ‘마음’을 뜻하는 ‘메드(Med)’로 표현했다. 크세노폰의 저서 속 소크라테스는 제우스가 자신의 연인들에게 불멸성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가니메데에게 불멸성을 부여했다고 지적했다.

 

고대 그리스의 꽃병에 묘사된 제우스의 잔을 채우는 가니메데. 출처>구글 검색

 

시에서 가니메데는 동성애적 욕망과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청년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늘 과묵한 청년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폴로니오스(Apollonius Rhodius, BC 3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의 <아르고나우티카>에서 가니메데는 공기놀이에서 자신을 속인 에로스 신에게 분노하고 아프로디테는 가니메데를 속인 아들을 꾸짖는다. 베르길리우스(Vergilius, BC 70~BC 19, 고대 로마의 시인)는 이 납치 사건을 비통하게 묘사한다. 소년의 나이든 스승들은 그를 다시 대지로 데려오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사냥개들은 쓸데없이 하늘을 향해 짖어댄다. 베르길리우스에 따르면 프리기아의 사냥꾼은 황갈색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올랐고 가르가라(아나톨리아에 있었던 고대 그리스 도시)의 산맥은 그가 올라갈수록 아래로 낮아지고 트로이는 그 아래에서 어두어졌다. 사냥개들은 헛되이 짖어대며 목을 지치게 하고 그의 그림자나 구름만을 쫓았다.

 

5세기 아테네에서는 가니메데 이야기가 꽃병 화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남성만으로 구성된 향연에 적합했다. 가니메데는 일반적으로 근육질의 청년으로 묘사되었다. 가니메데에 대한 최초의 묘사 중 하나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붉은색 그림의 크라테르(물과 술을 섞는데 쓰던 단지)이다. 한 쪽은 제우스가 가니메데를 쫓고 있는 모습이고 다른 쪽은 젊은이가 울부짖는 수탉을 높이 들고 고리를 굴리며 도망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나메데 신화는 알아볼 수 있는 현대적 용어로 묘사되었으며 가니메데도 수탉과 함께 도망치는 아킬레우스 화가의 꽃병에서와 같이 동성애 구혼 의식의 일반적인 행동으로 설명되었다. 수탉은 5세기 아테네에서 나이든 남성 구혼자가 낭만적으로 관심이 있는 젊은 남성에게 보내는 일반적인 선물이었다.

 

300x250

 

할리카르나소스 영묘에서 스코파스(Scopas, BC 395~BC 350,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와 같이 일한 레오카레스(Leochares, ?~BC 328, 아테네 출신의 조각가)는 잃어버린 가니메데와 독수리의 청동상을 주조했는데 이 작품은 독창적인 구성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분명히 바티칸의 유명 대리석 조각을 복사한 것이었다. 그러한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들은 바로크 조각에 영향을 미쳤다. 가니메데와 독수리로 변신한 제우스는 이 장면을 묘사한 16개의 석관이 있는 로마 장례식 기념물의 인기있는 주제였다.

 

가니메데는 르네상스(14~16세기에 일어난 문예부흥운동)부터 후기 빅토리아 시대(1837년부터 1901년까지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 기간)까지 시각 및 문학 예술 분야에서 동성애의 주요 상징이었다. 이후에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Caesar Traianus Hadrianus, 76~138)의 연인으로 알려진 안티누스(Antinous, 111~130, 하드리아누스의 총애를 받은 그리스 청년)가 더 인기있는 주제가 되었다.

 

세익스피어가 쓴 마법의 아르덴 숲을 배경으로 한 오해에 관한 희극 <당신 뜻대로>에서 양치기 옷을 입은 켈리아는 알리에나(낯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가니메데의 여동생)와 로살린드가 된다. 그녀는 보통보다 큰 키로 소년 가니메데처럼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올랜도를 유혹하기 위해 모호한 매력을 발산하지만 의도치 않게 양치기 옷을 입은 포에베를 유혹한다. 가니메데는 또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 1564~1593, 영국의 극작가)의 연극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의 오프닝에도 등장하는데 그와 제우스의 다정한 농담은 화난 아프로디테에 의해 중단된다. 토마스 미들턴(Thomas Middleton, 1580~1627, 잉글랜드의 극작가이자 시인)의 비극 <여자는 여자를 조심해야>에서 가니메데, 헤베 및 히멘은 궁정에서 술을 따르는 일을 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그 중 한 명에게 독살이 시도되었지만 그 계획은 엉망이 되고 만다.

 

베르사이유 궁전에 있는 가니메데와 제우스 동상. 출처>구글 검

 

가니메데에 대한 암시는 17세기 스페인 연극에서 자주 등장한다. 로페 데 베가(Lope de Vega, 1562~1635, 스페인의 극작가)의 연극 <복수 없는 처벌>에서 만투아 공작의 아들 페데리코는 미래의 계모인 카산드라를 구출하고 두 사람은 나중에 근친상간 관계로 발전한다. 비규범적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이 작품에는 독수리 형상을 한 유피테르(그리스의 제우스)가 가니메데를 납치하는 이탈리아 예술에서 파생된 에크프라시스(예술작품을 글로 묘사하는 것을 뜻하는 헬라어)일 가능성이 있는 긴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트리소 데 몰리나(Tirso de Molina, 1579~1648, 에스파냐의 극작가)의 희극 <여성에 대한 신중함>은 가니메데에 대한 흥미로운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미래의 왕을 독살하려는 유대인 의사는 가니메데의 것과 비교되는 잔을 들고 있다.

 

전해지고 있는 가니메데에 대한 비고대 묘사 중 하나는 안드레아 알차토(Andrea Alciato, 1492~1550, 이탈리아 작가)의 <엠블레마타> 초판의 목판화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독수리를 타고 있는 청년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성은 가니메데가 납치되는 장면을 묘사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조각가)의 스케치만 남아있을 정도로 흔하지 않다.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발다사레 페루치(Baldassare Peruzzi, 1481~1536)는 빌라 파르네시나(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르네상스식 건물) 천장에 긴 금발 머리와 소녀 같은 모습을 한 가니메데가 독수리 날개를 붙잡고 납치되는 장면을 포함시켰다. 이탈리아 화가 안토니오 다 코레조(Antonio Allegri da Correggio, 1489~1534)의 ‘독수리에게 납치된 가니메데’는 가니메데를 더욱 친밀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동성애의 상징 수탉을 들고 후프를 굴리고 있는 가니메데. 출처>구글 검색

 

루벤스(Rubens, 1577~1640, 벨기에 화가)는 가니메데에 관한 유명한 두 가지 버전을 그렸는데 하나는 리히텐 박물관에 영구 대여된 그림으로 컵을 건네는 독수리를 안고 있는 젊은 가니메데를 묘사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스페인 왕의 사냥 별장을 위해 그려진 그림으로 독수리에게 격렬하게 휩쓸려가는 청년을 묘사하고 있다. 독일 화가 요한 빌헬름 바우어(1607~1640)는 ‘가니메데의 승리’에서 독수리를 타고 올림포스로 가는 성숙한 가니메데를 묘사하고 있다. 한편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1606~1669)가 네덜란드 칼빈주의 후원자를 위해 그린 ‘가니메데의 납치’에서는 검은 독수리가 겁에 질려 울부짖으며 소변을 보는 천사 같은 통통한 아기를 높이 들어올리고 있다. 1685년 프랑스 조각가 피에르 라비롱(Pierre Laviron, 1650~1685)이 제작한 ‘메디치 가니메데’라는 제목의 가니메데와 제우스 동상이 베르사이유 정원에 서 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가니메데의 이미지는 항상 독수리를 동반한 순진한 청년의 모습이었으며 전설의 동성애적 측면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이야기는 종종 더 성적으로 다루어졌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가니메데 납치 신화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적 해석은 향상된 성적 완전성을 상징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신화 작가들에게는 관심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시기에 장 밥티스는 마리 피에르(Jean-Baptiste Marie Pierre, 1714~1789, 화가), 샤를 조셉 나투아르(Charles-Joseph Natoire, 1700~1777, 화가), 기욤 쿠스투 더 영거(Guillaume II Coustou, 1716~1777, 조각가), 피에르 줄리앙(Pierre Julien, 1731~1804, 조각가), 장 밥티스트 르뇨(Jean-Baptiste Regnault, 1754~1829, 화가) 등이 자신의 작품에 가니메데를 포함시켰다.<자료:월드히스토리, 위키피디아, 그리스 전설과 신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