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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14 노예근성은 자유가 없으면서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 (10)

한무숙(1918~1993) <감정이 있는 심연>/1957

 

요즘처럼 자유란 말이 남발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우리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민주주의에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에 두어야 하는지 논쟁은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핵심 키워드가 되고 있다. 여기서 다분히 정치논리가 개입된 양자의 정의를 논하기에는 우선 필자의 지적 수준이 얇다는 점을 인정해야겠고 또 하나는 현학적 글쓰기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늘상 말하고 있는 자유에 대한 기본개념 정도는 알고 있어야겠기에 잠시 공간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자유(freedom, 自由)의 사전적 의미는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이나 그러한 상태를 말한단다. 좀더 구체화시켜 본다면 본격적으로 자유에 관한 담론을 시작한 두 학자의 자유에 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더니 결국에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글이 되고 말았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자유주의자이며 신온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인 아이자이어 벌린(Isaiah Berlin, 1909~1997)은 자유를 적극적 자유소극적 자유로 분류한다. 이 분류는 각각  ‘~로의 자유‘~에서의 자유로 좀 더 쉽게 설명된다. 그러나 정작 벌린 자신은 소극적 자유의 지지자였다. ‘적극적 자유는 집단의 자유로 변질된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벌린의 소극적 자유는 독일의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 1900~1980)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프롬은 다양한 속박에서 해방되어 획득한 소극적 자유는 고독과 불안을 불러일으키며 자유를 또 하나의 압박으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나에게 직접적인 압력이 없다면 권위에 순응하거나 복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프롬은 히틀러의 파시즘을 소극적 자유가 잉태한 최악의 정치체제라고 주장했다. 프롬은 소극적 자유의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서는 자율이나 자치와 같은 적극적 자유가 같이 작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설가 한무숙은 제5회 자유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감정이 있는 심연>에서 자유가 없으면서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짜장 노예근성이 아니겠는가라는 말로 소극적 자유의 폐단에 대해 파시즘과는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고 있다. 주인공 를 통해 언급된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소설 <감정이 있는 심연>은 주인공 가 애인(?)인 전아가 입원해 있는 정신병원에 면회를 가는 것으로 시작해서 끝내 면회를 하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것을 끝을 맺는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와 전아가 첫만남을 시작으로 애인이 되기까지의 회상을 통해 저자의 주제의식을 은연 중에 드러내 보이고 있다. 사설이 길었던 탓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와 전아를 둘러싼 갖가지 구속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지며 이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굳이 구분하자면 와 전아는 내부적 속박과 외부적 압박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는 존재다. 분명 자유가 없는 상태지만 오랜 시간 체화된 경험은 현재의 삶 자체를 자유로 착각한 채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자신을 둘러싼 내적 또는 외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될까.

 

 

 

의 속박은 일종의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이다. 나는 어릴 적 부모를 여의고 몰락한 대지주의 마름을 맡아보는 당숙 밑에서 성장했다. 여기서 나는 무한한 신분적 콤플렉스를 느끼게 된다. 전아를 사랑하게 된 것도 미국 유학을 위해 그야말로 나의 모든 것을 바쳐 공부한 것도 열등감이 주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집이 그렇게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사실이 나에게 등골에서부터 자작자작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쾌감을 주기도 하였다. 물론 그러한 반감과 증오감은 전아의 집이라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고 전아의 집이 대표하는 어느 계급에 향했던 것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감정이 있는 심연> 중에서-

 

반면 전아의 속박은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분히 관습적이고 종교적인 성격을 띤다. 태어날 때부터 연약했던 전아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기독교라는 집안 분위기에서 병적일 정도의 압박을 느끼며 살고 있다. 게다가 이 집안은 추문에 휩싸여 있는데 다름 아닌 작은고모가 부정하게 잉태한 아이를 없애려다 철장 신세를 졌다는 것이다. 문제는 큰고모가 죄악의 심판 과정을 보여준다며 어린 전아를 법정에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전아는 죄수복을 입은 작은고모를 보고는 정신을 잃고 만다.

 

어쩌면 어린 그녀는 사랑이란 말보다 라는 말을 먼저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이모의 반감을 산 것은 전아의 큰고모가 관용하려는 것을 신에의 배덕이라는 명분 아래 그 아우의 비밀을 발겨낸 일인 모양인데, 그보다도 더 소름이 끼치는 것은 죄의 끝을 보여야 된다고 열한 살 난 어린 전아를 그 공판장에 끌고 나간 사실을 것이다. -<감정이 있는 심연> 중에서-

 

인간을 속박하는 요인들은 다양하다. 관습이나 인습 등의 전통윤리와 집단의 횡포와 더 나아가 국가의 폭력까지. 나에게 물리적인 압박이 가해지기 전에는 자유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숨을 쉬고 있으면서도 공기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에리히 프롬이 말한 소극적 자유의 단면일 것이다. 여기에는 다소 지나친 표현이기는 하지만 분명 충격요법이 필요하다. 요즘 양심과 사상의 자유마저 집단의 왜곡된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이 부족한 우리사회의 단면인지도 모르겠다.

 

두 주인공이 억압과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의지는 다소 파격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아직 전통적인 윤리의식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1950년대 전아의 자유의지는 요즘은 일상화된 그림치료를 통해 육체적 탐닉으로 표출된 것이다. 전아는 그동안 그녀에게 가해졌던 유·무형의 속박으로부터 진지하게 자신을 정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전아의 자유의지를 확인한 나의 열등감으로 인한 구속은 허망함으로 끝나고 만다. 일본의 악덕상인이 거만의 루블화를 챙겨 고국으로 떠나려던 날 아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것처럼.

 

한편 영화 속 까메오처럼 살짝 스쳐가는 정신병원 환자들의 등장은 자유의지가 탄압받는 현실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당시 시대상황이 집단적인 소극적 자유상태로 빠지게 했음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개인의 양심마저 끄집어내어 필요에 따라 재단하려는 권력과 이에 부화뇌동하는 여론을 보면서 자유란 또는 자유의지란 인간을 인간이게 한 가장 원초적인 성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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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강여호 트랙백 1 :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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