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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할머니의 죽음으로 밝혀지는 위선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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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의 <할머니의 죽음>/1923년

과거 70,80년대 허름해 보이는 점퍼에 밀짚모자로 한껏 멋을 낸 대통령의 모내기 장면은 뉴스와 신문의 단골메뉴였다. 그 한 컷을 내보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이 어렵사리 짐작이 가는 건 그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정통성 없는 권력은 그들이 풍기는 피비린내를 그런 식으로 씻어내곤 했다. 국민들에게는 고통스럽게 봐야만 했던 촌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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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 중반 이후 사라지는가 싶던 이런 촌극이 21세기에 다시 부활하고 있다. 이번에는 뿌연 흑백필름 대신 천연색으로 더욱 화려해졌다. 화려해졌다 뿐인가! 발군의 연기실력까지 더해졌다. 나마저도 발길이 뜸해진 재래시장을 뻔질나게 드나든다. 어묵이며 떡볶이며 닥치는대로 드셔준다. 허그와 눈물은 덤이다. 거기에 준비된 애드리브까지 던져주면 지켜보는 국민들은 뻑! 간다. 거기까지다. 동원된 환호와 박수에 도취되어 의기양양 푸른집으로 돌아가면 서민들의 등골은 또다시 힘없이 꺾이고 만다.

이런 걸 두고 위선이라고 한다
. 겉으로만 착한 척 하는 것. 위선은 무섭다. 웃음 뒤에 숨겨진, 눈물 속에 감춰진 서슬퍼런 칼날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군사독재보다 문민독재가 더 무서운 이유다.

 

현진건의 소설 『할머니의 죽음』을 이야기하려다 난데없이 삼천포행을 선택한 이유는 오늘의 주제가 위선이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가족들과 더 나아가 하는 인간들의 가면이 시나브로 벗겨진다.

 

효로 위장한 위선

 

우선 독특한 구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조모주병환위독으로 시작해서 오전3시조모주별세로 끝이 난다. 3월 그믐날에서 아지랑이가 하늘거리는 봄날까지의 이야기다.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육촌 친척들까지 모두 한 집에 모인다. 저자는 할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는 가족들에게서 위선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저자의 시선은 가장 먼저 중모(계모란 말이 더 이해가 쉬울 듯)에게로 집중된다.

 

잠도 자지 않고 할머니 곁을 지키는 계모에게서 효심의 지극함과 정성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계모의 가면을 벗기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계모의 과도한 효심에 주인공 나는 놀라운 효성을 부리는 게 도무지 우리 야단칠 밑천을 장만하는 게로구나.’ 생각한다. 특수한 모자관계 때문은 아닐까 섣부른 판단을 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상이다.

 

 

계모는 자신의 위선을 덮으려는 듯 앉고자 하는 할머니를 아프다는 이유로 극구 말린다. 이유는 이랬다. 할머니는 뒤를 가리지 못했고 그것을 얼른 빨아드리지 못해 제물에 뭉켜지고 말라붙은 데다 불목에 데어 궁둥이 언저리가 모두 벗겨져 있었다. 일어나고 싶어도 계모의 만류로 일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답답하고 갑갑했으면 손자의 단추 끼운 것과 옷고름 맨 것과 저고리 입은 것조차 답답해 보였을까? 계모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 못하는 바 아니지만 너무했지 싶다. 뿐이던가! 계모는 누워있는 할머니 앞에서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염불을 모시고 집도 초상집인양 꾸며놨다. 계모의 염불에 계모보다 더 지독한 불교신자인 할머니도 뿔이 났나보다.

 

듣기 싫다! 염불소리 듣기 싫다! 인제 고만해라.”

 

저자의 시선은 계모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에게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사촌과 육촌 형제들도 계모만큼은 아니지만 가식적이긴 마찬가지였다. 할머니의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닌 탓도 있지만 그들에게 할머니는 귀찮은 존재였다. 아들 며느리와 손자 며느리들은 정신줄을 놓고 손자에게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할머니는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형제들 또한 각자 일을 핑계삼아 여기를 탈출하고자 한다.

 

가족이라는 가면 속에 숨겨졌던 그들의 위선이 발각되는 순간 그들은 더욱 더 노골적으로 변해간다. 아예 병세가 호전되고 있는 할머니의 돌아가실 날을 미리 알아보기에 이른다. 2,3주일은 더 연명하리라는 의사에 말에 형제들은 서둘러 할머니 집을 떠나간다. 이들 가족의 가면 속에 숨겨진 위선은 저자와 주인공만이 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합죽한 입을 오물오물하여 막 떠넣은 밥알맹이를 삼키고는 이렇게 말을 한다.

 

내가 혼자 일어났지. 어떻게 일어나긴. 흉악한 놈들! 암만 일으켜달라니 어데 일켜주어야지. 인제 나 혼자라도 일어난다.”

 

할머니의 삶에 대한 갈구로만 치부하기에는 할머니가 누워서 봤던 세상은 너무도 매정하였으리라! 그렇게 할머니는 아름다운 봄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할머니의 부음전보는 내가 봄옷으로 갈아입고 친구들과 우이동 벚꽃 구경을 막 나가려는 때였다는 마지막 대목은 할머니의 쓸쓸한 죽음이 교차되면서 극적 효과를 더해준다.

 

현진건은 근대와 현대 우리사회가 앓고 있는 위선이라는 병폐를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것도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만만치 않은 설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위선이 무서운 건 그 속내를 알 길이 없어서다. 군사독재가 휘두르는 총칼이야 대놓고 하는 짓이니 대비라도 하지, 문민독재가 숨겨놓은 위선의 총구는 당하기 전에는 알아차리기 힘들다. 아니 예상하더라도 최상위 권력을 떠받치고 있는 서브 권력들의 파상공세로 저항할 동력을 잃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희망을 포기할건가!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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