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이 유노 신전을 보고 떠올린 카르타고의 최고 여신, 타니트
타니트(Tanit) 또는 틴니트(Tinnit)는 고대 카르타고의 최고신이었다. 그녀는 베르베르 지역신과 바알 하몬의 배우자에서 기원했다. 암몬이 리비아의 지역신인 것처럼 타니트도 마찬가지였다. 타니트는 누미디아(기원전 202년부터 기원전 46년까지 지금의 알제리와 튀니지 서부에 존재했던 베르베르인의 왕국) 사회의 모계적 측면을 상징했다. 타니트는 이집트의 네이트 여신, 그리스의 아테나 여신과 동일시되었다. 그녀는 달, 전쟁, 지혜, 문명, 공예 등을 관장한 여신이었다. 그녀는 또 그녀를 숭배한 마을과 가정의 수호신이었다. 고대 북아프리카인들은 타니트의 표식을 묘비와 집에 새겨 가족의 안녕을 기원했다. 그녀의 주요 신전은 티니수트(튀니지 비르부레그바), 키르타(알제리 콘스탄틴), 람바이시스(알제리 바트나), 테베스테(알제리 테베사)등에 있다. 고대에 매년 열렸던 타니트 축제는 오늘날까지도 북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 거행되고 있지만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이교도 축제라는 이유로 금지하기도 했다.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의 페니키아 식민 도시로 튀니지의 현대 도시 튀니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카르타고는 ‘신도시’를 의미하는 페니키아 이름 카르타다슈트의 로마식 버전으로 기원전 9세기경 로마 전설에서 페니키아의 도시 국가 티레(지금의 레바논) 왕의 딸인 디도 여왕 또는 엘리사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러나 디도는 페니키아 달의 여신의 별칭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아마도 카르타고의 수호 여신 타니트의 한 측면 또는 다른 이름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타니트 숭배는 기원전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타니트가 페니키아 식민지(카르타고) 주민들이 그 전부터 숭배한 지역신인지 아니면 페니키아에서 온 아스타르테/아티라트의 한 형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타니트는 ‘카르타고의 여인’이라고 불리며 그 도시의 최고신이었다. 그녀는 하늘의 신 바알-하몬과 함께 카르타고를 감시하고 보호했다. 보호신으로서 그녀는 몇몇 전쟁의 신 측면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스타르테처럼 창을 들고 사자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카르타고에서 그녀는 신탁소를 가지고 있다고 전해졌는데 이는 아마도 그녀가 별의 여신으로서의 역할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타니트는 로마가 북아프리카로 확장된 헬레니즘 시대에 서부 지중해,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몰타, 가데스 및 기타 여러 지역의 페니키아 문화권에서 숭배되었다. 카르타고가 함락된 후에도 타니트는 북아프리카에서 여전히 라틴 이름인 유노 카엘레스티스로 숭배되었는데 로마인들은 그녀를 유노(그리스의 헤라)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타니트는 북아프리카에서 유래된 대규모 지역 숭배를 가지고 있었다. 고대 카르타고에서 타니트는 바알 하몬 숭배를 능가했고 적어도 카르타고 지역에서는 기념물에 바알 하몬보다 더 빈번하게 언급되었다. 기원전 5세기부터 타니트 숭배는 바알 하몬의 그것과 연관되었다. 그녀는 페네 바알(‘바알의 얼굴’이라는 뜻)과 랍(‘추장’이라는 뜻)의 여성형인 라바트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비문과 물질적 유물이 풍부한 북아프리카에서 타니트는 바알 하몬의 배우자였고 천상의 전쟁의 여신이자 어머니 여신이었으며 다산의 상징이었다. 타니트 숭배는 카르타고에서 유행했는데 특히 기원전 6세기에 카르타고와 티레가 분리된 후 아스타르테와 멜카르트의 전통적인 페니키아 숭배가 북아프리카 지역신인 타니트와 바알 하몬의 페니키아 숭배로 대체된 이후였다.
몇몇 주요 그리스 여신은 인테르프레타티오 그라이카(‘그리스식 해석’이라는 뜻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외국 신을 자신들의 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에 의해 타니트와 동일시되었는데 그리스 역사가들은 아테나가 북아프리카에서 고대 리비아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타니트를 아테나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측면(지혜, 전쟁, 직조 등)을 지닌 여신으로 언급했다. 기원전 5세기경 이 지역을 여행한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아테나 동상의 의상과 아이기스 방패는 그리스인들이 리비아 여성에게서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리비아 여성들이 가죽옷을 입고 염소 가죽 망토의 술이 뱀이 아니라 가죽끈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장비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 이름 자체가 팔라스(아테나의 별칭) 동상의 의상이 리비아에서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비아 여성들은 털이 없는 술이 달린 ‘에게아’를 꼭두서니로 물들인 드레스 위에 걸쳤는데 그리스인들이 이 에게아의 이름을 ‘아이기데스’로 바꾸었다는 것이 헤로도토스의 주장이다. 헤로도토스는 게다가 그리스인들이 의식에서 불리는 노래도 리비아에서 유래했으며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를 운전하는 법도 리비아인들에게서 배웠다고 주장했다.
페니키아 남부의 사렙타에서 발굴된 신전에서 여신 타니트와 아스타르테(이슈타르)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비문이 발견되었다. 두 신의 도상학적 묘사는 나중에 지중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카르타고 무역 제국의 영향으로 유사해졌다. 두 신 사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도상학적 묘사는 두 여신의 유사한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 카르타고에서 또 다른 전쟁의 여신 아스타르테는 여신 타니트와 함께 숭배되었다. 두 신은 분명히 동등한 위치는 아니었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유래하지도 않았다. 타니트는 기원전 5세기 이전에는 카르타고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이는 그녀의 명확한 기원이 북아프리카 지역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페니키아의 아스타르테는 침략 전쟁의 신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반대로 리비아의 타니트는 ‘가정의 수호신’으로 불리며 그녀가 숭배되고 있는 지역이나 문명을 지키기 위한 전쟁의 신이었다.
카르타고인들은 가디르(현재의 스페인 남서부에 위치한 카디스)와 다른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타니트-아스타르테 숭배를 이베리아 반도로 퍼뜨렸는데 그곳에서 여신은 토착신들과 동화되었을 것이다. 타니트 숭배는 로마 정복 이후에도 여전히 활발했는데 그녀는 로마 여신 유노(그리스의 헤라)와 결합해 데아 카엘레스티스라는 여신이 되었는데 이는 바알 하몬이 사투르누스(그리스의 크로노스)에 동화된 것과 같은 방식이다. 데아 카엘레스티스는 기원후 4세기 고전 고대가 끝날 때까지 카르타고 문화의 특성을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카르타고가 함락된 후에도 타니트는 북아프리카에서 여전히 라틴 이름인 유노 카엘레스티스로 숭배받았는데 이는 그녀가 유노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유노 카엘레스티스 신전은 로마-카르타고의 가장 큰 기념물 중 하나였으며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순례자의 성지가 되었다.
타니트의 표식은 많은 고대 석조 조각품에서 발견된다. 삼각형은 타니트의 상징으로 머리를 상징하는 원 위에 얹혀 있고 손을 상징하는 수평선으로 분리되어 있다. 나중에 사다리꼴은 종종 이등변 삼각형으로 대체되었다. 이 상징을 손을 드는 여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녀는 또한 초승달과 금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타니트는 종종 성적 상징으로 벌거벗은 모습으로 묘사되고 사자를 타고 있거나 사자 머리를 가지고 있어 전사로서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녀는 또한 날개가 달린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아마도 이집트 여신 이시스를 묘사한 미술 작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타니트와 관련된 동물과 식물은 사자, 비둘기, 야자수, 장미 등이다. 또 다른 모티프는 그녀를 에우로파(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페니키아 공주)와 동일시해 타니트를 황소(아마도 최고신 엘을 상징)를 탄 여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타니트의 기원은 우가리트 판테온의 전쟁과 사냥의 여신 아나트에서 찾을 수 있다. 고고학적 증거와 고대 문헌 자료 모두에서 타니트와 바알 하몬 숭배의 일부를 형성하는 아동 희생을 지적하는 상당한 증거가 발견되었지만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아동 희생을 이론화했다. 1970년대에 카르타고 토펫 발굴을 지휘한 미국의 고고학자 로렌스 E. 스테이거는 그곳에서 아동 희생이 행해졌다고 확신했다. 로마 국립 연구 위원회의 파올로 셀라는 카르타고 아동 희생에 대한 문헌적, 비문학적, 고고학적 증거를 요약했다.
카르타고는 한때 로마와 적대 관계였으며 기원전 3세기와 2세기에 걸쳐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두 강대국 사이에는 세 차례의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다. 결국 로마인들이 승리자가 되었고 카르타고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전통에 따르면 도시는 황폐화되었고 다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소금 땅이 되었다. 도시의 완전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타니트와 바알 하몬의 신전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인접한 곳에는 아이들 묘지가 있었다. 카르타고인과 페니키아인은 아이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히브리인들은 페니키아인들이 아이들을 산 채로 불태워 그들의 신 몰록에게 바쳤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 증거는 남아있지 않다. 카르타고에서는 아이들 무덤이 바알 하몬과 타니트에게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증거로 여겨져 왔으며 무덤 위의 많은 석주에는 그들의 신이 새겨져 있다. 이 묘지는 현대에 지옥을 뜻하는 성경 단어에서 유래한 토펫으로 명명되었다.
토펫은 성경에서 나오는 히브리어로 예루살렘 근처에서 가나안 우상 숭배를 실천하며 유대교를 떠난 가나안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이들을 제물로 바친 장소를 가리킨다. 현재는 화장된 인간과 동물의 유해가 있는 모든 유적지를 통틀어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스라엘인 희생자가 매장되었다고 명시되어 있지 않고 단지 불태워졌다고만 나와 있지만 불태운 장소는 아마도 매장지와 인접해 있었을 것이다. 페니키아인들이 불태우거나 매장하는 장소나 그 관행 자체를 어떻게 지칭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21년에 발굴된 살람보 토펫에 있는 토양은 희생 제물 화장터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올리브 나무 숯이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타니트의 신전과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었다. 토펫 항아리 일부에서 발견된 양과 염소의 유해는 이곳이 죽은 조산아들을 매장한 곳이 아니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아마도 아이들 대신 동물들이 제물로 바쳐졌을 것이다. 대체 동물이 없는 경우 아이들이 희생되어 토펫에 묻혔을 것이다. 기원전 4세기경 카르타고 토펫의 면적은 6,000㎡ 이상으로 추정되며 9개의 매장지가 있었다. 기원전 4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에 약 2만개의 항아리가 놓였으며 이 관행은 기독교 시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항아리에는 신생아의 탄 뼈와 어떤 경우에는 태아와 2살짜리의 뼈가 들어 있었다. 부모가 자식 중에 가장 어린 아이를 희생 제물로 바쳤을 것이다.
매장된 아이들의 나이를 분석한 결과 사산아도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 유적지의 유해 연령 분포는 출생 직전 또는 직후에 자연사로 사망한 아이들이 많았다. 로마 국립 연구 위원회의 세르지오 리비키니 교수는 토펫은 질병이나 기타 자연사로 조기 사망한 유아의 유해를 수용하기 위해 설계된 어린이 묘지였으며 이러한 이유로 특정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아이들은 다른 곳에 매장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이 아마도 생존자를 위한 동일한 신들의 자비로운 보호를 보장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였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히브리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의 패트리샤 스미스 교수는 카르타고 토펫의 치아와 골격 분석을 통해 유아의 사망 연령과 자연사의 예상 연령과 상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들에 대한 증오에도 불구하고 타니트를 그들의 유노 루시나와 동일시했다. 유노 루시나는 빛의 여신이자 출산의 여신으로 로마인들의 수호 여신이었다. 타니트는 하늘의 여신이기도 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그녀를 하늘의 여신인 데아 카엘레스티스로 명명했다. 기원전 4세기와 3세기의 동전에는 때때로 타니트가 사자를 타고 창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일반적으로 그녀는 뒤에 초승달이 있고 왕관을 쓴 머리에 밀단을 화환으로 묶은 형태로 그려져 있다.
로마 전설에서 카르타고의 위대한 장군 한니발은 크로토나 근처의 유노 라치니아 신전을 습격했다. 크로토나는 원래 그리스인들이 세운 이탈리아 남부 도시였다. 따라서 유노 라치니아는 헤라 신전이었다. 이 신전은 순금 기둥으로 유명했는데 한니발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기둥에 구멍을 뚫었다. 실제로 견고하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약탈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날 밤 한니발은 여신이 자신에게 그녀의 신전을 약탈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남은 눈마저 파괴할 것이라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 유노 라치니아에서 한니발은 자신의 고향(카르타고) 여신 타니트를 알아보고 기둥을 성전에서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는 황금 소를 만들었고 기둥 꼭대기에 놓았다고 한다.
타니트의 숭배는 로마 군인들에 의해 카르타고에서 스페인, 몰타, 사르데냐로 전파되었다. 시칠리아의 셀리누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신전이 그녀에게 바쳐졌다. 로마의 카피톨리누스 언덕에는 처녀 카엘레스티스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신전이 세워졌다. 타니트 동상은 218년부터 222년까지 재위한 젊은 황제 엘라가발루스에 의해 로마로 옮겨졌다. 그는 타락한 게이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18세에 화장실에서 살해당했고 그의 시신은 거리로 끌려 나가 일반 범죄자처럼 티베르강에 던져졌다. 그러나 그는 동방 신들의 열렬한 숭배자였으며 그의 이름도 아랍-로마 태양신 엘라가발에서 따왔다. 그는 로마에 엘라가발 신전을 세웠고 그곳에 타니트 동상을 설치하여 카엘레스티스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