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전설

'터미널'의 어원이 된 고대 로마의 경계의 신, 테르미누스

여강여호 2024. 11. 2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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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신화에서 테르미누스(Terminus)는 부동산과 공동체의 경계를 표시하는데 사용된 경계표지에 거주하고 이를 보호하는 신이었다. 테르미누스의 정체성은 너무나 명확해서 그의 이름 자체가 실제로 그러한 표지를 의미하는 라틴어이기도 하다. 그러한 돌(경계표지)을 설치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그 배치를 기념하고 성역화하기 위해 제물을 바쳤다. 또한 토지 소유자들은 매년 2월 23일에 테르미누스 신을 기리기 위해 테르미날리아라는 축제를 열었다. 공공 장소에서의 이러한 표지 외에도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사원에서 테르미누스를 기리는 작은 신전도 발견되었다. 이런 이유로 테르미누스는 유피테르 테르미날리스(Jupiter Terminalis)라는 이름으로 유피테르(그리스의 제우스)의 한 측면과 동일시되었다.

 

경계석에 묘사된 테르미누스.

 

고대 작가들은 테르미누스 숭배가 초대 왕 로물루스(기원전 753년~717년경) 또는 그의 후계자 누마(기원전 717~673년)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에 소개되었다고 기록했다. 현대 학자들은 이를 경계표지에 내재된 힘에 대한 초기의 물활론적(우주 만물에 영혼이 있다는 믿음) 숭배의 유물 또는 재산 분할과 관련된 신에 대한 원시 인도-유럽 신앙의 로마적 발전 등으로 다양하게 인식했다. 그리스 신 헤르메스(로마의 메르쿠리우스)에서도 유사점을 볼 수 있는데 그 이름과 초기 종교적 관련성은 헬레니즘 사회에서 숭배되었던 경계표지인 헤르므스에 기반을 두었다.

 

테르미누스는 그의 육체적 현현(경계석)과 너무 강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상당한 신화적 내용을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지만(그리스 전통에서 화로를 상징하는 헤스티아와 매우 유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신화에서 언급되었다. 테르미누스가 언급된 신화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유피테르 사원 내에 테르미누스 신전이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병인학적(원인을 밝히는 학문) 이야기였다. 이들 신화에서 초기 로마의 젊은 왕인 타르퀸(Lucius Tarquinius Superbus. ?~기원전 495년. 로마의 전설적인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왕)은 로물루스 시대에 봉헌된 성지의 유적 위에 거대한 사원을 건설하여 후손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그 자리에 있던 종교적 조각상과 신전을 옮겨야 했다. 그는 거기에 봉헌된 신들을 화나게 하지 않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각 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신들이 자신의 계획을 받아들일지 여부를 알아보았다.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유피테르 신전 상상도.

 

전통에 따르면 이 작업을 시작할 때 신들이 제국의 방대한 미래에 대한 신성한 암시를 보냈다고 한다. 다른 모든 신전을 해체하는 데는 유리한 징조였지만 테르미누스 신전에는 불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테르미누스의 거처가 옮겨지지 않았고 모든 신들 중 그 혼자만이 그의 봉헌된 경계에서 불려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의 제국에서 모든 것이 굳건하고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지속적인 지배에 대한 이 징조는 제국의 위대함을 예고하는 경이로운 일로 이어졌다. 그들이 사원의 기초를 파고 있을 때 얼굴이 완벽한 인간의 머리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 모습은 그 장소가 제국의 거점이자 전 세계의 머리가 될 것이라는 징조로 해석되었다. 이것은 로마의 예언자들과 에트루리아에서 의회에 불려온 사람들이 내린 해석이었다.

 

따라서 테르미누스와 그가 로마 중심부에 계속 존재하는 것은 신이 상징하는 불가침적 경계에 의해 상징적으로 표현된 로마의 강력함을 예고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오비디우스는 같은 사건을 해석하면서 로마 시민의 일상 생활과의 관련성을 강조했다. 같은 이야기 속에서 오비디우스는 테르미누스가 의미하는 경계의 불가침성을 강조했다. 테르미누스가 신들의 왕인 유피테르에 의해 대체되는 것을 거부했던 것처럼 그는 이웃의 땅이 질투하는 필멸자에게 옮겨지는 것도 거부할 것이다. 이 특정한 신화적 에피소드는 기원전 3세기경 초기 기독교 작가인 락탄티우스가 로마 사람들의 뒤떨어진 종교적 관행을 풍자하도록 요구할 만큼 충분한 문화적 흐름이었다.

 

테르미누스는 오늘날 터미널의 어원이 되었다.

 

오비디우스에 따르면 테르미누스는 사투르누스(그리스의 크로노스)가 유피테르라고 생각하고 삼킨 돌이었다. 타르퀴니우스가 카피톨(유피테르의 신전)을 짓고자 했을 때 그리고 많은 고대 신들의 신전을 발견했을 때 그는 그들이 유피테르에게 굴복할지 여부를 점술로 그들에게 물었다. 모두가 테르미누스를 구하기로 동의했고 테르미누스는 그대로 남게 되었다. 따라서 오비디우스는 테르미누스를 카피톨의 움직이지 않는 바위라고 불렀다. 게다가 경계의 신의 힘은 그를 상징하는 바위의 속성에 존재한다고 인식되었다. 사실 이러한 표식의 대부분에는 그것을 건드릴 만큼 어리석은 사람에게 닥칠 것으로 보이는 끔찍한 저주가 새겨져 있었다. 가령 ‘이 돌을 훼손하거나 제거한다면 당신은 종족의 마지막 사람이 될 것이다.’와 같은.

 

앞서 언급했듯이 테르미누스라는 이름은 경계석을 뜻하는 라틴어로 공화국과 제국 후기에 기록된 그의 숭배는 이러한 경계표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고대 로마의 토지 측량사이자 작가인 시쿨루스 플라쿠스에 따르면 로마 사람들은 구덩이를 파고 고정할 지점 근처의 딱딱한 땅에 돌을 수직으로 세웠다. 그런 다음 연고, 덮개, 화환 등으로 장식했다. 고정할 구멍에서 그들은 희생 제의를 치르고 제물을 죽인 다음 불을 밝힌 횃불로 태웠다. 그들은 머리를 덮고 피를 구멍에 떨어뜨리고 그 안에 향, 옥수수, 벌집, 와인을 던졌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테르미누스에게 바치는 제물들도 그 구멍에 넣었다. 모든 제사 음식이 불에 타면 그들은 돌을 뜨거운 재 위에 올려놓고 조심조심 고정했으며 경계석 주변에 깨진 돌 조각을 세워 더 튼튼하게 고정했다.

 

이러한 희생 제의 관행 외에도 테르미날리아라는 연례 축제가 신을 기리기 위해 거행되었다. 가족들은 각자의 경계표지 옆면에 화환을 걸고 제단에서 테르미누스에게 제물을 바쳤다. 오비디우스는 이 제물이 벌집과 와인이라고 기록했다. 경계표지 자체는 희생된 양이나 돼지의 피로 적셨다. 그 다음에는 공동체 연회가 이어졌고 노래로 테르미누스를 찬양했다.

 

테르미날리아 때 행해진 의례는 사유지 주인이 거행했지만 관련된 공적 의례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오비디우스는 로마에서 비아 라우렌티나(로마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여섯 번째 이정표에서 양을 제물로 바쳤다고 언급했다. 이 이정표는 초기 로마인들과 라우렌툼(로마 남서쪽의 도시)의 주민들 사이의 경계표지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테르미누스의 돌이나 제단은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에 위치해 있었다. 이 돌은 하늘에 노출되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바로 위 천장에 작은 구멍이 있었다. 테르미누스와 유피테르의 연관성은 테르미누스가 그 신의 한 측면이라는 가정으로 확장되었다. 기원전 1세기경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는 ‘유피테르 테르미날리스’를 언급했고 한 비문에는 신의 이름이 ‘유피테르 테르’로 적혀 있었다.

 

테르미누스의 연관성이 재산 경계에서 시간적 개념을 포함한 일반적인 한계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증거가 있다. 로마 공화정 달력에 따르면 윤달인 메르케도니우스가 한 해에 추가되었을 때 그것은 2월 23일 또는 2월 24일 뒤에 놓였고 일부 고대 작가들은 2월 23일에 열렸던 테르미날리아가 한 때 연말이었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303년 2월 23일에 기독교인 박해를 시작하기로 한 결정은 테르미누스를 기독교의 발전에 한계를 두기 위해 동원하려는 시도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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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작가들은 테르미누스 숭배가 로마 건국 이전에 이탈리아 반도에 살았던 사빈족에서 유래했다는 데 동의했으며 로마에 소개된 것은 로마의 건국 왕 로물루스(전통적인 통치 기간 기원전 753~717년)의 사빈족 동료인 티투스 타티우스 또는 로물루스의 후계자인 누마 폼필리우스(기원전 717~673년) 시대였다고 생각했다. 누마에게 공로를 돌린 작가들은 재산에 대한 폭력적인 분쟁을 예방하기 위해서 였다고 설명했다. 플루타르코스는 테르미누스가 평화를 보장하는 신이라는 속성에 따라 그의 초기 숭배에는 희생 제의가 포함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현대 학자들에 따르면 로마 종교는 원래 애니미즘(모든 사물에 영혼이 있다는 믿음)이었는데 나중에 특정 사물이나 활동을 독립적인 인격적 존재를 가진 신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관련된 신화가 거의 없고 물리적 대상과 긴밀히 연관된 테르미누스는 그러한 단계에서 거의 발전하지 못한 신의 분명한 사례로 보였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애니미즘’이라는 용어의 적절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모든 의식에서 가장 작은 신이나 우령을 불러들이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없다. 또한 우리가 수호신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종류의 생명이나 영혼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러한 중요한 경우에 우리는 수호신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종류의 생명이나 영혼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며 수호신을 번역하는 데 적합한 단어일 뿐만 아니라 로마의 많은 하위 신들을 설명하는 데 적합한 단어인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어떤 학자들은 유피테르, 유벤타스(그리스의 헤베, 청춘의 여신), 테르미누스를 원시 인도-유럽 삼주신의 로마 형태로 간주해 베다의 미트라(천둥의 신), 아리아만(관습의 신), 바가(부의 신)와 비교했다. 이 관점에서 주신(주피터/미트라)은 두 개의 하위 신과 연관되었는데 하나는 사회에 남성을 진입시키는 것(유벤타스/아리아만)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재산을 공정하게 나누는 것(테르미누스/바가)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테르미누스의 부상이 고대 로마에서 토지 소유자 계층의 규모가 커지는 것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서로 다른 지역과 서로 다른 소유자의 땅 사이의 경계가 중요한 문제가 되면서 고대 로마의 입법자들은 경계를 침범하는 것은 하늘에 대한 범죄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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