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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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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낯선 우리말①, 보짱 그야말로 말[言]의 홍수 시대다. 그 진원지는 바로 바다 건너 세상과 인터넷이다. 반면 불타는 가뭄을 온몸으로 맞서고 있는 말도 있으니 일상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우리말이다. 일상 대화 중에 또는 높으신 분들의 연설 중에 외래어나 외국어를 섞어 말하면 자신의 위상이 높아지는 양 현학적인 단어 선택은 아름다운 우리말의 존재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터넷 속의 출처도 불분명한 말들은 외계어라는 이름으로 일상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제 우리말은 TV 속 우리말을 소개하는 짧은 코너에서나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문화 교류를 역설하지만 정작 우리 문화의 핵심인 우리말은 그 설 자리를 빼앗기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소설을 읽다보면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몇 백 년 전의 소설..
MB만 비껴간 코미디 풍자, 과연 바람직한가 20세기 한국소설05/창비사 1980년대 KBS 코미디 프로그램 [유머 일번지] 중에 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비룡 그룹 임원 회의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기본 설정으로 한 당대 최고의 인기 코미디 프로였다. 비룡 그룹 임원회의에는 몇 명의 정형화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김회장(故김형곤), 쥐뿔도 아는 게 없지만 회장 처남이라는 이유로 자리를 버티고 있는 양이사(故양종철), 쓴소리만 해대는 그래서 늘 찬반신세인 엄이사(엄용수), 김회장 옆에서 딸랑딸랑 방울소리만 울려대는 영혼없는 김이사(김학래). 마치 도때기 시장 같은 비룡 그룹의 임원회의는 김회장이 주먹으로 자신의 이마를 때리며 “잘 되야 될텐데…”라는 말과 함께 끝이 났다. 이들이 쏟아내는 웃음 보따리는 힘겨운 시대를..
뺏기지 않는 놈은 도적질할 권리도 없다 [20세기 한국소설] 중 채만식의 『명일』/「조광」12~14호(1936.10~12)/창비사 펴냄 만일 내일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무슨 색깔일까? 노란색, 파란색, 흰색…아마 검정색이나 회색으로 내일을 표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내일을 의미하는 또 다른 한자인 명일의 명 자도 ‘밝다(明)’라는 뜻이다. 새 날이 밝아온다는 직접적인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옛 사람들은 내일이 가지는 속성을 희망이고 꿈이고 기대라는 믿음으로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았을지 어설픈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여기 내일을 온통 회색빛으로 채색하고 있는 지식인이 있다. 그는 소위 룸펜(Lumpen) 지식인이다. 그에게 내일은 명일(明日)이 아니라 명일(冥日)이다. 채만식의 소설 『명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발표된 『레디메이드..
태석이 빨갱이가 된 사연 [20세기 한국소설] 중 채만식의 『도야지』/「문장」27호(1948.10)/창비사 펴냄 “1940년대의 남부조선에서 볼셰비키, 멘셰비키는 물론, 아나키스트, 사회민주당, 자유주의자, 일부의 크리스천, 일부의 불교도, 일부의 공맹교인, 일부의 천도교인, 그리고 주장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로서 사회적 환경으로나 나이로나 아직 확고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잡힌 것이 아니요, 단지 추잡한 것과 부정사악한 것과 불의한 것을 싫어하고, 아름다운 것과 바르고 참된 것과 정의를 동경 추구하는 청소년들, 그 밖에도 XXX과 XXXX당의 정치노선을 따르지 않는 모든 양심적이요 애국적인 사람들(그리고 차경석의 보천교나 전해룡의 백백교도 혹은 거기에 편입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사람을 통틀어 빨갱이라고 불렀느니라.” -『도..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게 뭐 있어' [20세기 한국소설] 중 채만식의 『논 이야기』/「협동」(1946.10)/창비사 펴냄 파출소 한 켠 긴 의자에는 늘 한 남자가 자고 있다. 넥타이는 반쯤 풀어져 있고 양복 윗도리는 의자에 걸쳐져 있으며 흰색 와이셔츠는 바지 밖으로 삐져나와 추레하기 짝이 없다. 신문지로 경찰서 아니 스튜디오의 환한 조명을 가리고 자고 있는 이 남자. 그도 평범한 늑대인지라 여우의 향기에 벌떡 일어나 방청객을 향해 사자후(?)를 토해낸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 방청객들은 박수를 넘어 열광적인 환호로 이 술취한 남자의 등장을 맞이해 준다. 많은 논란 끝에 폐지되었던 KBS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 코너에서 박성광은 이렇게 세상을 향해 소리쳤다. 방청객들과 시청자들은 묘한 카타르..
도진개진 인생들의 도토리 키재기 [20세기 한국소설] 중 채만식의 『치숙』/「동아일보」(1938.3.7~14)/창비사 펴냄 ‘도진개진’이라는 말이 있다. 윷놀이에서 도가 나오나 개가 나오나 거기서 거기란 뜻일 게다. 표준어인지 사투리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 중 하나다. 한자의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와 같은 말이다. 도토리가 제 아무리 크다 해도 재보면 다 고만고만하다는 뜻이다. 도진개진 인생들, 도토리들만 사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채만식의 『치숙(痴叔)』은 폼나는(?) 인생들이 너 잘났냐, 나 잘났다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채만식은 이들을 고만고만한 도토리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이들이 채만식에게 밉보인 이유를 들어보자. 채만식의 풍자는 전방위적이다. 『치숙』에서는 등장인물 모두가 풍자의 대상이 된다. 등장인..
'레디메이드 인생'으로 본 청년실업의 진실 레디메이드 인생/채만식/1934년 청년실업이 날로 심각한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도 언론도 취업시즌에만 반짝 관심을 가질 뿐 강 건너 불구경이다. 2009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청년 인구 중 비경제활동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56%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청년 고용률은 외환위기 당시보다 낮은 수준이라고 하는데도 진지한 공론의 장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경제활동인구의 증가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도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정부의 눈높이를 낮추라느니, 중소기업에는 아직도 인력이 모자란다느니 하는 청년실업대책과 이를 받아쓰기에 급급한 언론의 태도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저렇게 취직만 하려고 애를 쓸게 아니야. 도회지에서 월급 생활을 하려고 할 것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