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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픈 서민들의 이상향 삼포를 아십니까 삼포 가는 길/황석영/1973년 마당 앞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온갖 채소들로 가득한 뒤뜰을 나지막한 산이 내려다보고 아이의 눈과 같은 높이로 서있는 언덕배기에는 누렁 송아지와 강아지가 한가로이 술래잡기 하는 곳. 반나절에 한 번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주름진 노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흐르고 굽이굽이 힘든 줄 모르게 고개를 넘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해가 내려앉은 곳. 질흙 같은 어둠 속에서도 이야기가 새어 나오는 곳. 누군가에게는 빛바랜 사진 속 풍경일 수도 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마음 속에 고이고이 담아둔 꿈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천박스럽다고 하지만 로또 한 장에 일주일이 희망인 서민들의 꿈은 소박하다. 아니 고달픈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민들의 꿈은 얕아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고 대..
갈매기의 꿈이 새우깡인 게 뭐가 어때서 리처드 바크(Richard David Bach, 1936년~)의 /1970년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중·고등학교 아니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당연한 이치인 것을 'Boys be ambitious(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영어 문장과 대동소이한 의미로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러나 이 말의 출처인 리처드 바크(Richard David Bach, 1936년~)의 은 정작 읽어보지 못했다. 아마도 대학 새내기 시절 처음 샀던 것 같다. 그때도 결국엔 사회과학 서적에 밀려 책장 한 귀퉁이로 내몰리고 말았다. 그 후 꿈과 좌절이 반복되었던 20년이라는 세월을 집어삼키고서야 여기에 혹시 내가 꿈꾸는 미래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뽀얀 먼지를 걷어내고 검지..
<첫눈> 눈오는 밤 왕포집 여자들에게 생긴 일 방영웅(1942~)의 /「월간문학」38호(1972.1) 한국 문학과 지성의 양대 산맥이라고 하면 흔히들 1966년 창간된 《창작과 비평》과 그로부터 4년 후 첫 선을 보인 《문학과 지성》을 꼽는다. 서로 다른 색깔, 즉 민족문학 계열의 《창작과 비평》과 순수문학을 대변하는 《문학과 지성》은 각각 '창비 계열'과 '문지 계열'의 수많은 작가들을 배출해 내면서 한국 문학과 지성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창작과 비평》은 1953년 장준하 선생이 창간한 《사상계》가 박정희 전대통령의 부정부패와 친일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재정난에 허덕이다 1970년 폐간된 이후 맥이 끊길뻔 했던 한국 진보 지식인들의 담론의 장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런 《창작과 비평》이 배출해 낸 대표적인..
"노랑수건, 네가 강자(强者)다" [20세기 한국소설] 중 이태준의 『달밤』/「중앙」1호(1933.11)/창비사 펴냄 강자가 살아남는다 하고 살아남는 놈이 강자라 한다. 인간이란 참 간사하다. ‘호모○○○’, ‘호모○○○’, ‘호모○○○’ 라는 난해한 말을 만들어 동물과 구분하려 들면서 정작 동물들의 세계인 ‘약육강식(弱肉强食)’을 진리인양 떠받들고 산다. 도대체 강자란 누구이며 어떤 놈이 살아남는단 말인가! 권력과 돈을 가진 자?, 뛰어난 머리와 빠른 발을 가진 자? 아니다. 약삭빠른 자가 강자다. 살아남는 자가 강자라면 분명 쥐처럼 약삭빠른 자가 강자임에 틀림없다. 약자가 만들어준 강자의 세상. 꼴찌에게 보내는 박수는 강자의 거만함인지도 모른다. 이태준의 소설 『달밤』의 주인공 황수건은 빡빡 깎은 머리지만 보통 크다는 정도 이상으로 ..
캡틴 박지성, 더 큰 나를 위해 나를 버리다 박지성의 /2010년 2002년 6월14일. 5천만 붉은 악마의 시선은 온통 한국 대 포르투갈의 예선 마지막 경기가 펼쳐진 인천 문학경기장으로 향했다. 비록 폴란드를 상대로 월드컵 사상 첫승을 올리기는 했으나 16강 진출의 제물로 삼았던 미국과의 경기를 1대1로 비긴 탓에 붉은 악마의 열기는 한여름 태양보다도 더 이글거리고 있었다. 경기장에서, 거리에서, 집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고 때로는 숨을 죽이며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옆사람 손을 힘껏 잡아야만 했다. 이기면야 얼마나 좋겠냐마는 16강 진출을 위한 경우의 수를 따지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비겨야만 하는 경기. 그러나 포루트갈에는 세계적인 축구스타 피구가 버티고 있었다. 홈이라는 잇점 빼고는 어느 것 하나 포르투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우리로서는 져도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