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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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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처음 만난 아버지가 불편했던 이유 봉숭아 꽃물/김민숙/1987년 어릴 적 이맘때쯤이면 고향집 마당 한 켠에는 마치 노래에서처럼 담장에 바짝 기대어 봉숭아꽃이 붉게 물들었다. 붉게 물든 것은 봉숭아꽃만이 아니었다. 연신 손부채질을 하고 계신 어머니의 손톱도, 어머니 무릎을 베개 삼아 꿀맛같은 단잠을 자고 있는 여동생의 손톱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동생의 손톱이 부러웠는지, 봉숭아 꽃물이 잘 물들도록 어머니 무릎을 베고 자고있는 동생을 시샘해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어머니를 졸라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 하나에만 봉숭아 꽃잎 이긴 것을 올려놓고 이파리로 감싼 뒤 실로 칭칭 동여맸다. 동생처럼 어머니 무릎에 머리를 베고 손에는 번지지 않고 손톱에만 예쁘게 물들기를 기도하며 잠이 들곤 했다. 그러나 이것도 글자를 모를 때의 일이었지, 국..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내 사촌 별정 우체국장/김만옥/1986년 "당신은 지금 살기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살기 좋은 세상' 이란 것이 '○○○은 ○○○이다'와 같이 정확한 정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각양각색인지라 선뜻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기도 하겠다. 그렇다고 해도 '소시민'이라고도 부르는 보통 사람들의 대답은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머리카락 한올한올마다에 굴곡진 인생의 자화상을 선명하게 아로새긴 사람들 집단에서는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안방에서 클릭 하나만으로 지구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고, 주말에는 바다 건너 휴양지에서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고, 전화 한 통이나 클릭 한 번으로 끼니마저 해결할 수 있으니 과거..
그녀의 헌신적 사랑, 그것은 복수였다 먼 그대/서영은/1983년 리비아는 국민소득이 일 인당 1만 달러에 달했으나 인구는 삼백만밖에 되지 않았다. 리비아 정부의 절대 과제 중 하나는 인구를 늘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리비아 정부는 다산을 권장하고 사막 오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시로 끌어내기 위해 갖가지 혜택을 제공했다. 그러나 사막에서 살아온 유목민의 상당수는 그 유혹을 뿌리치고 더 깊이 사막 속으로 들어갔다. 인간은 갈증을 몹시 두려워하지만 그들은 갈증뿐인 사막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 갈증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 리비아에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전설같은 지도가 있었다. 그 지도에는 사막의 땅 속 깊은 곳으로 흐르는 푸른 물길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이 길을 신의 길이라고 불렀고 사막의 오지에서 나오지 않는..
팜비치에는 팜비치가 없다 팜비치/최정화/2012년 "이이는 늘 이런 식이에요. 정말 엉뚱하죠?" "아직 소개를 안했지? 자기 애들이 바다에서 노는 동안 나더러 파라솔을 잠깐 써도 좋다고 하셨어. 이분은 가족과 함께 팜비치에 사신대. 여보. 진짜 팜비치 말이야." - 중에서- 최정화의 소설 에서 무슨 대단한 비밀을 말하는 양 아내는 '진짜 팜비치'라고 말할 때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내는 '그'가 상어 튜브를 가져오느라 오랜 시간을 지체한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 지금 이 젊은 부부는 네 살 난 딸애를 데리고 팜비치 해변에서 한여름의 열기를 식히는 중이다. 우리 시대 고개숙인 가장의 슬픈 자화상 미국 지도를 보면 매부리코마냥 대서양을 향해 삐죽 튀어나온 곳에 팜비치(Parm Beach)라는 세계적인 휴양지가 있다. 필자처럼 ..
월리에게 스티커를 붙여주세요 월리를 찾아라/윤고은/2012년 올해 6월 기준 우리나라 실업률은 3.3%이다. 이 중 청년층 (15~29세) 무려 7.9%로 전체 실업률을 훨씬 상회하고 있으며 전체 실업자 84만 1000명 중 청년 실업자는 32만 7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청년 고용률도 계속 하락해 올해는 40%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 통계만 보면 주위에서 체감하고 있는 실업률에 비해 그리 심각하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민간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년 실업자 수는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정부와 민간연구소의 실업률 통계는 지나친 괴리가 있다. 심지어 체감 실업률과는 더 큰 차이가 느껴진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정부 통계는 불완전 취업자까지 모두 취업으로 간주하기 때..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 사막을 건너는 법/서영은/1975년 작열하는 태양이 그나마 남은 습기마저 온전히 빨아들이는 곳, 생명이란 태초의 기억 속에 갇혀버린 곳, 땅으로부터 상승하는 열기에 삶의 이유마저 흔들리는 곳, 신화 속 이야기의 재현인 양 살 한 점 붙어있지 않은 백골이 뿌려진 곳. 극한 도전의 단골메뉴이자 마지막 단계인 사막은 그렇게 절망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도전에 쓴 웃음을 연신 내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막 맞은 편에 희망이 있다면, 그래서 꼭 건너야만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사막 입구에서 그저 주저앉을 것인가, 무색 무취의 화염 속으로 뛰어들 것인가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아니 삶에 대한 열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당신은 저 절망의 사막을 건너야만 한다. 강요된 선택이건 자발적 선택이건 당신이 해야..
그들은 왜 셜로키언 놀이를 하는가 여기, 왓슨이 간다/오성용/2012년 셜로키언을 아는가? 누구나 한번쯤 탐정 셜록 홈스의 사건 해결에 매료되어 밤을 샌 적이 있을 것이다.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이면서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까지 갖춘 셜록 홈스는 수많은 사건을 해결하면서 전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급기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탐정'의 대명사가 된 인물이다. 홈스에 대적할 인물로 프랑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이 창조한 아르센 뤼뺑을 들기도 하지만 홈스와 달리 뤼뺑은 천재적인 두뇌를 범죄에 이용하는 괴도라는 것이다. 셜로키언(Sherlockian)은 아서 코넌 도일의 추리소설 주인공인 셜록 홈스의 추종자를 뜻하는 말이다. 초기에는 소설 속 인물인 셜록 홈스를 실존 인물로 믿고, 홈스 이야기를 자세히 아는 사람을 가리켰으나, 지금은 셜..
자기혐오는 어떻게 아름다운 문학이 되었나 아름다운 얼굴/송기원/1993년 문학을 삶의 어떠한 가치보다 우위에 놓고 그것에 끌려 다니던 문학청년 시절의 탐미주의부터 비롯하여, 머지않아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러서도 아직껏 아름다움 따위를 찾는다면, 남들에게 철이 없거나 얼마쯤 덜떨어지게 보이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쭙잖게 고백하건대, 십 년 가까이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한 채 거의 절필상태에서 지내다가 가까스로 다시 시작할 작적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아름다움 때문이다. - 중에서-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일당은 그 해 7월4일 중대 발표를 한다. 당시 계엄사 당국은 김대중이 집권욕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사조직인 민주연합 집행부에 복학생을 흡수, 학원조직에 연결시켜 서울대·전남대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