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시인의 마을

(35)
망실(亡失) 망실(亡失)/문태준/2013년 무덤 위에 풀이 돋으니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 같아요 오늘은 무덤가에 제비꽃이 피었어요 나뭇가지에서는 산새 소리가 서쪽 하늘로 휘우듬하게 휘어져나가요 양지의 이마가 더욱 빛나요 내게 당신은 점점 건조해져요 무덤 위에 풀이 해마다 새로이 돋고 나는 무덤 위에 돋은 당신의 구체적인 몸을 한 바구니 담아가니 이제 이 무덤에는 아마도 당신이 없을 거예요 *문태준: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 , , , 등이 있음. 송골매의 9집 앨범 중에 '사랑하는 이여 내 죽으면'이란 노래가 있다. 갓 스무살로 접어들 즈음 아직 미치도록 사랑해도 모자랄 그 나이에 왜 이 노래를 흥얼거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냥 이별도 아니고 떠난 자..
XX다움을 강요하는 사회, 정상일까 다움/오 은/창작과 비평 2013년 가을호 파란색과 친숙해져야 해/바퀴 달린 것을 좋아해야 해/씩씩하되 씩씩거리면 안돼/친구를 먼저 때리면 안돼/대신, 맞으면 두배로 갚아줘야 해 인사를 잘해야 해/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해/받아쓰기는 백점 맞아야 해/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돼/밤에 혼자 있어도 울지 말아야 해/일기는 솔직하게 써야 해/대신, 집안 부끄러운 일은 쓰면 안돼/거짓말은 하면 안돼 꿈을 가져야 해/높고 멀되 아득하면 안돼/죽을 때까지 내 비밀을 지켜줘야 해/대신, 네 비밀도 하나 말해줘야 해 한국 팀을 응원해야 해/영어는 잘해야 해/사사건건 따지고 들면 안돼/필요할 때는 거짓말을 해도 돼/대신, 정말 필요할 때는 거짓말을 해야만 해/가족을 지켜야 해 학점을 잘 받아야 해/꿈을 잊으면 안돼/대신..
자연이기를 거부한 인간의 마지막 몸짓 자연과의 협약/백무산(1955~) 지구는 우주라는 물위에 떠 있는 배 인간과 자연은 하나이면서 둘이다 인간은 그 배를 만드는 데 못 하나 박지 않았다 인간은 그 집을 짓는 데 돌 하나 나르지 않았다 지구 위의 모든 것은 인간의 역사보다 길다 인간은 어떠한 창조 행위도 하지 않았다 인간은 금이 간 사과 하나 붙이지 못한다 인간이 창조한 것은 탐욕 착취의 먹이사슬뿐 배의 밑창에서 지붕까지 먹어치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더이상 자연이 아니며 자연은 더이상 인간적 자연이 아니며 오늘 자연은 자본가적 자연이기 때문이다 지금 밑창이 뚫리고 지붕이 새고 있다 다시 인간은 자연과 공존을 꿈꾼다지만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공존의 전제는 대화와 공정한 나눔의 약속이다 자연과 단체협약이라도 맺으려는가 어떻게 그들의 생각을 ..
악질 친일파가 한국 대표 여성 시인으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vs 지원병(志願兵)에게/모윤숙(1910~1990) -나는 광주 산골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난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아무말, 아무 움직임 없이/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표지/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 소위였고나/가숨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깊은 피의 향기여!/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였노라./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처 날뛰는 조국의/산맥을 지키다가/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중략-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그..
얼마나 서러우면 빗물이 다 울까, 설움의 덩이 설움의 덩이/김소월(1902~1934) 꿇어앉아 올리는 향로의 향불. 내 가슴에 조그만 설움의 덩이. 초닷새 달 그늘에 빗물이 운다. 내 가슴에 조그만 설움의 덩이. 꿇어앉아 향불을 피우는 행위가 마치 경건한 구도자의 모습같다. 설움의 크기도 계량화시킬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설움을 화자는 조그맣지만 '덩이'라고 표현했다. 가슴을 저미는 설움이 얼마나 컸으면 뭉치고 뭉쳐 '덩이'가 됐을까. 구도자의 자세로 설움을 삭히려는 화자의 모습은 종교보다도 더 숙연하고 진지하다. 빗물이 다 울 정도니 설움으로 화자가 받았을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화자는 가슴 한 구석을 채우고 있는 설움을 떨쳐낼 수 있을까. 화자에게 설움은 '향불'과 '빗물'로 상징화되지만 아쉽게도 '..
피로 지킨 NLL, 더이상 피를 흘리지 않는 게 해법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신동엽(1930~1969)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다가 재미난 꿈을 꾸었지. 나비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다가 발 아래 아시아의 반도 삼면에 흰 물거품 철썩이는 아름다운 반도를 보았지. 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 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 리의 완충지대, 이른바 북쪽 권력도 남쪽 권력도 아니 미친다는 평화로운 논밭.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다가 참 재미난 꿈을 꾸었어. 그 중립지대가 요술을 부리데. 너구리새끼 사람새끼 곰새끼 노루새끼들 발가벗고 뛰어노는 폭 십 리의 중립지대가 점점 팽창되는데 그 평화지대 양쪽에서 총부리 마주 겨누고 있던 탱크들이 일백팔십 도 뒤로 돌데.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 물방개처럼 한 떼는 서귀포 밖 한 떼는 두만강 밖 거기서 제각..
이 땅의 아사달 아사녀에게 바치는 시 아사녀/신동엽(1930년~1969년) 모질게도 높운 城돌 모질게도 악랄한 채찍 모질게도 음흉한 술책으로 죄없는 월급쟁이 가난한 백성 平和한 마음을 뒤보채어쌓더니 산에서 바다 邑에서 邑 學園에서 도시, 도시 너머 궁궐 아래. 봄 따라 왁자히 피어나는 꽃보라 돌팔매, 젊어진 가슴 물결에 헐려 잔재주 부려쌓던 해늙은 餓鬼들은 그혀 도망쳐갔구나. -애인의 가슴을 뚫었지? 아니면 조국의 旗幅을 쏘았나? 그것도 아니라면, 너의 아들의 학교 가는 눈동자 속에 銃알을 박아보았나?-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우리들의 피는 대지와 함께 숨쉬고 우리들의 눈동자는 강물과 함께 빛나 있었구나. 四月十九日,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 高原에서 풀을 뜯으며 양달진 동남아 하늘 고운 半島에 移住 오던 그날부터 삼한으로 백제로 고려..
한국사람이 '어뢴지' 하면 미국사람 되나요 말의 사기사님네께/신동엽(1930년~1969년) 한 천년 졸아나보시지요 일제히 고개들을 끄덕대며 무슨 싸롱이라든가에 들어앉아 별들이 왜 별입니까 그것은 땅덩이지요. 아 그 유명한 설계사 피카소씨라시죠 아니, 저, 뭣이냐 그 입체파 가수들이라시던가요. 멋쟁이시던데요 새파란 제자들을 대장처럼 데리구 앉아. 농사나 지시면 한 백석직은. 품도 한창 아쉴 땐데. 염체 좋은 사람들 그래, 멀쩡한 정신들 가지구서 병신 노릇 하기가 그렇게나 장한가요 마음껏 흉물 쓰구 뒤나 자주 드나드시죠 양식은, 피땀 흘려 철마다 꼭 꼭 보내올릴께요. 뽕먹는 누에처럼 그 괴상한 소리나 부지런히 뽑아서 몸에 자꾸 감아보세요 「어떻게 되나」 참 훌륭도 하시던데요 어쩌면 그렇게도 꼭 같을까 미국사람을 참 훌륭히도 닮으셨어 조끔만 더 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