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과학적으로 밝힌 한글의 언어학적 가치와 탁월함

반응형

한글의 발명/정 광 지음/김영사 펴냄

 

한글 연구의 차원을 바꾼 심도 깊은 역작. 한글 제정의 동기와 목적, 발명에 참여한 인물과 제정 시기부터 한글이 과학적인 이유와 영향을 받은 문자까지. 기존 한글 연구의 맹목적 정설을 뒤집는 과학적 연구. 그동안 학계가 다루어온 한글에 대한 모든 쟁점에 새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영명하신 세종대왕이 사상 유례없는 독창적 글자를 만드셨다’는 신화를 넘어, 과학적이고 이론적 바탕 위에서 한글의 역사적 의미와 언어학적 가치, 탁월함을 밝힌다.

 

한글, 왜 만들었는가


한글은 한자음의 발음을 표기하기 위한 발음기호로 만든 것이다. 원나라가 성립하고 이전 중국어와 발음이 전혀 다른 한아언어(漢兒言語)가 대두되면서 중국의 한자음과 우리 한자음이 크게 달라져 소통에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우리 것을 교정하여 <동국정운> 한자음을 만들었고 이에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올바른 발음이란 의미로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유신들은 중국 한자음이 정음을 표기하는 문자라는 뜻으로 정음(正音)이라 불렀다.


교착어인 우리 말 쓰임에 고립어인 한자는 어순과 의미 전달에 있어 문제가 있었다.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가 ‘변음토착(발음을 바꿔서 토를 달다)’의 난제를 해결하자 세종은 이 문자로 우리말을 기록할 수 있다고 보고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석보상절>을 짓게 하고 스스로 <월인천강지곡>을 지어 이를 확인했다. 이 책에서는 세종이 이 둘을 합편하여 <월인석보>를 간행하면서 권두에 훈민정음의 <언해본>을 붙여 공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의 많은 연구에서 <언해본>의 이 앞에 있는 구절 “國之語音이 異乎中國?야 與文字로 不相流通?? ― 나랏 말?미 中國에 달아 文字와로 서르 ??디 아니 ??”를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언해문이 매우 애매하여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즉, 한문 원문은 <한문본>과 <해례본>에서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 [한자음에 대한] 우리나라의 발음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는다”라 하여 한자에 대한 우리의 발음과 중국과의 차이를 지적한 것이다. 다만 언해문은 “우리말이 중국어와 달라서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는다”라고 언해되어 오해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이 서문의 기본적인 뜻은 어디까지 한자음의 차이를 지적한 것이지 언어의 차이를 말한 것은 아니다.

 

 

 


고려 전기(前期)까지 사서오경(四書五經)으로 배운 한문으로 중국인과 소통이 가능하였는데 원대(元代) 이후 북경(北京)의 한어(漢語)의 발음이 우리의 전통 한자음과 매우 달라서 이 말과는 전혀 통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우리 한자음을 수정하여 예전처럼 한문 학습에 의하여 중국과의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하려는 의도로 동국정운(東國正韻)식 한자음을 구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개정된 한자음이야말로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바른 한자음, 즉 훈민정음(訓民正音)이었으며 이것의 발음기호로 한글을 제정한 것으로 본 것이다.


이 책에서 특별히 강조된 것은 한자를 그대로 읽는 것이다. 아전인수 격이나 자기 멋대로 한자를 해석하지 말고 원래의 뜻대로 읽자는 것이다. 그래야 보다 정확한 사실을 밝힐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바른 글자”로 해석한다든지 ‘정음(正音)’을 “올바른 글자”로 보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음(音)’은 발음이지 글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자에 있지도 않은 뜻이나 발음으로 한자를 멋대로 읽는다면 어떻게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가?


 

누가 만들었는가


수양대군이나 동궁, 정의공주 등 가족과 세종이 직접 골랐다는 친간팔유(親揀八儒)로 불리는 성삼문, 신숙주 같은 젊은 학자의 도움도 있었지만, 한글 창제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불가의 학승들이었다. 고대 인도의 조음음성학이 팔만대장경에 포함되어 고려와 조선에 유입되면서 불가의 학승들이 음성학을 공부,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훈민정음 <언해본>이 불서(佛書)인 <월인석보>에 부재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고대 인도에서 발달한 음성학은 비가라론(毘伽羅論), 한자로 번역하여 성명학(聲明學)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속에 들어 있어 불교의 유입과 더불어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입되었다. 한글의 창제에 불가의 많은 학승들이 참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글은 이러한 학술적 배경을 갖고 창제된 것이어서 과학적이며 발달된 표기체계를 보이는 것이다.


『죽산안씨대동보』의 ‘정의공주유사’에 보이는 기사에서 정의공주가 한 일은 ‘변음토착’을 해결한 일이다. 이것은 한문의 구결(口訣)에서 형태부, 즉 조사(助詞)와 어미(語尾)의 우리말을 한자를 빌려 토(吐)를 달 때에 “-은(隱), -이(伊), -??니(爲尼), -이라(是羅)”와 같이 한자의 발음과 새김을 빌려 적는다. 즉, 앞의 예에서 “-??니(爲尼), -이라(是羅)”의 ‘尼, 羅’는 발음을 빌렸지만 ‘爲, 是’는 새김을 빌려 ‘-??, -이’로 읽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是)’와 ‘위(爲)’라는 자음(字音)을 바꿔서 ‘-이’, ‘-??’로 토를 단 것을 ‘변음토착(變音吐着, 음을 바꿔서 토를 달다)’이라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변음의 토는 한자를 익숙하게 구사하고 한문에 정통한 유신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고 괴로운 문자 표기였다. (…) 훈민정음으로 토를 다는 경우 이러한 ‘변음토착’의 어설픈 한자 표기는 완전하게 해소된다. 뿐만 아니라 고유어 표기에서 한문과 다르게 조사와 어미를 붙여 써야 하는 교착적 문법구조의 우리말 표기에 대한 인식이 정리된 것 같다. 의미부는 한자나 이두로 표기해왔지만 조사와 어미와 같은 형태부 표기가 한문과 다른 우리말 표기의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한글로 토를 단 이후로는 변음토착과 같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한문 본문과의 구별도 확실해져서 이해가 훨씬 쉽게 되었다. 이로부터 세종은 새 문자로 고유어를 표기할 수 있음을 깨닫고 자신이 고안한 문자로 우리말 표기에 몰두하였는데 이것은 동궁, 수양, 안평, 정의 등의 자녀들과 함께 작업하였다(졸고, 2006). 또 자녀 가운데 수양대군은 신미(信眉), 김수온(金守溫) 등과 함께 <증수석가보(增修釋迦譜)>를 우리말로 언해하여 신문자로 우리말 표기를 실험하게 하였다.


이 시도가 성공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이 저술되는 중간중간에 세종은 스스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으면서 신문자로 동국정운식 한자음의 표음과 고유어의 표기를 자신이 직접 시험하게 된다. 이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을 몸소 확인하고 <해례본>에 붙인 자신의 서문과 예의(例義)를 우리말로 풀이하여 자신이 편집한 <월인석보>의 구권(舊卷)에 붙여 세상에 알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훈민정음의 <언해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언제 제정되고 반포되었는가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한글이 세종 28년 9월 상한에 간행한 소위 <해례본 훈민정음>으로 공표된 것으로 보아왔다. 그래서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였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해례본>은 난삽한 성리학과 성운학의 이론으로 새 문자를 설명한 것이어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책이다. 그래서 <해례본> 앞부분의 석장 반을 우리말로 풀이한 훈민정음의 <언해본>이 간행된 것을 한글의 공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 <언해본>은 천순 3년(1459), 즉 세조 5년에 간행한 <월인석보>의 권두에 <세종어제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첨부되었기 때문에 모든 연구자들이 이때에 훈민정음의 언해가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정통 12년, 즉 세종 29년의 간기가 있는 <월인석보>의 옥책을 근거로 하여 <월인석보>의 구권은 세종 생존 시에 간행되었고 여기에 <훈민정음>이란 이름의 언해본을 붙여 간행하여 공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 월인석보>는 그동안 학계에 알려진 것처럼 천순(天順) 3년, 세조(世祖) 5년(1459)에 처음 간행된 것이 아니라 세종 생존 시에 간행되었다. 이것은 세조의 어제(御製) 서문(序文)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세종이 구권(舊卷)을 간행하였으며 이 책의 권두에 <언해본>을 붙여 간행한 것은 전혀 새 문자의 공표를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정통(正統) 12년(1447), 즉 세종 29년에 개성 불일사(佛日寺)에서 제작한 <월인석보>의 옥책이 있다.


< 월석>의 옥책에 대하여 그동안 학계에서 의혹의 눈길로 보았으나 고려와 조선 전기에서는 흔히 있는 불사(佛事)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월석>의 구권(舊卷)이 존재한 것에 대한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이미 많은 논저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언해본 훈민정음은 그 권수제(卷首題)를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한 것과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으로 한 것의 두 종류가 있으며 이 두 권수제를 따로 가진 몇 개의 서로 다른 필사본도 전해온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어느 것이 원본이냐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들을 교합(校合)하여 정본(定本)을 세우려는 노력도 있었다. (…) 그러나 정통 12년의 <월석>이 존재한다면 신편(新編)에서와 같이 구권(舊卷)의 권두에도 <언해본>이 부재되었을 것이고 그 이름은 ‘세종어제(世宗御製)’가 아니라 그냥 ‘훈민정음(訓民正音)’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기는 세종이 아직 생존했을 때이고 당시에는 그의 존호(尊號)가 ‘세종(世宗)’이 될지는 아무도 모를 시기이기 때문이다.

한글이 과학적인 진짜 이유


한글이 과학적인 것은 15세기에 제정된 훈민정음이 조음음성학의 이론에 입각하여 음운을 분석하고 문자를 제정한 때문이다. 20세기에 서양에서 발달한 조음음성학은 인간의 언어음(言語音)을 발성기관의 조음(調音) 메커니즘에 의거하여 조음 위치와 조음 방식으로 나누어 구별하였는데 세종대왕은 이보다 500여 년이나 앞서서 이러한 음성학의 이론을 동원하여 문자를 제정하고 이 문자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였으며 각 문자의 음가들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심오한 음성학적 이론을 세종은 어디서 알았을까?


뿐만 아니다. 중성(中聲)이라 하여 모음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였고 음절 형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그리고 각 모음들이 서로 대립적으로 인식됨을 음양(陰陽)과 천지(天地), 오행(五行), 그리고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생위(生位) 성수(成數)로 설명하였다. 모음 음소의 존재를 대립이란 변별성으로 파악한 것이다. 음운을 대립적인 구조(構造)로 보고 이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구조음운론은 20세기에 서양에서 발달하였다.

한글은 과연 사상 유례없는 문자인가


중국의 북방민족들은 한자로 자신들의 언어를 기록하기가 어려워 일찍부터 스스로 표음문자를 제정하여 자국어를 기록했다. 기원후 650년경에 만든 티베트의 서장문자부터 10세기 거란의 요나라에서 만든 거란문자, 12세기 여진의 금나라에서 만든 여진문자가 그랬다. 13세기에 몽골의 칭기즈 칸은 위구르 문자를 빌려서 몽고어를 기록했고 14세기에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 칸은 한글과 유사한 파스파 문자를 만들어 한자음과 몽고어를 기록하였다. 이 책에서는 한글이 15세기에 이와 같은 북방민족의 전통을 이어 만든 문자라고 주장한다.

한글의 발명에 고대 인도 음성학의 영향이 있었음은 지금까지 아무도 지적한 바가 없다. 그러나 한글 제정의 근거가 되었던 파스파 문자가 티베트의 서장(西藏)문자에서 왔는데 서장문자는 인도 음성학의 이론에 의거하여 제정된 것이다. 따라서 7세기경에 제정된 서장문자나 13세기경의 파스파 문자, 그리고 15세기의 한글에 이르기까지 그 첫 글자가 ‘ㄱ’, 즉 /k/로 시작되고 이어서 /kh, g, ng/의 문자가 이어진다. 훈민정음에서도 /ㄱ, ㅋ, ㄲ, ㆁ/의 순서로 문자를 제정하였다. 모두가 인도 음성학의 영향 아래 제정된 것이다.


파스파 문자의 한자음 표음은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한자 교육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즉, 한자음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음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므로 표음문자인 파스파자는 한자의 발음을 표음하는 데 더할 나위가 없는 좋은 발음기호였다. 이 문자가 고려 후기에 널리 애용된 것은 몽고어 표기를 위한 문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드디어 파스파 문자와 동일한 역할의 훈민정음을 제정하여 한자음 표기에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파스파 문자에서 인정한 입성 운미의 13자는 모두 음절 초의 자모를 다시 썼는데 이는 훈민정음에서도 종성으로 초성을 다시 쓴다고 한 것으로 보아 파스파 문자와 동일한 발상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광운>계 운서음에서 입성 운미를 13개로 보았으나 훈민정음에서는 조선 한자음에서 운미의 종성이 초성 17자가 모두 구별되는 것으로 본 점에서는 차이가 난다. 즉 <해례>에서는 8개의 종성만이 구별됨을 인정하고 그 예를 조선어의 고유어로 보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훈민정음이 초, 중, 종성으로 구별하고 초성과 중성은 별도의 문자를 제정하였으나 종성은 초성을 다시 쓴다고 한 것이 파스파 문자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이다.

새 왕조의 통치계급 물갈이에 이용되기도 한 한글


이 작업을 통하여 새 문자로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물론이고 우리말도 모두 적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자신의 서문(序文)과 예의(例義) 부분을 언해하고 그동안 작업한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편하여 <월인석보>라는 이름으로 간행하면서 언해한 부분을 권두에 붙여 간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새 문자, 즉 한글의 공포라고 볼 수 있다.
이 작업은 모두 세종 28년에 이루어진다. 즉, 세종 28년 9월에 <해례본>이 간행되면서 새 문자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었고 10월에 <월인석보>를 간행하면서 <언해본>으로 세상에 이 문자를 공표하게 된다. 11월에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여 이를 보급하고 12월에 시행한 이과(吏科)와 취재(取才)에서 훈민정음을 시험에 부과한다.


명明과 조선에서 한자의 표준음을 정하는 것은 당시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표준 한자음을 기준으로 과거시험이 시행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이런 방법으로 자신들의 추종 세력을 과거에 응과(應科)시켜 인재를 선발하여 통치 계급의 물갈이가 가능하였다. 조선에서도 중국의 표준 한자음에 맞추어 사대문서를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표준 한자음, 즉 정음(正音)의 규정은 명明의 것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우리 한자음을 동국정운식으로 개편하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한글의 발명이 그 역할을 대신 하였으므로 굳이 한자음의 개정까지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제3장 ‘5. 한글 제정의 과정’에서 정리한 새 문자 창제의 경위에 의하면 훈민정음을 세종 28년 10월에 공표하고 이를 2개월 후인 같은 해 12월에 인재 선발의 시험에 부과하였다. 이것은 바로 새 문자의 창제가 신, 구세력의 물갈이용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발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