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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세계명작단편소설

연인의 달콤한 속삭임, 그런데 왜 나는 눈물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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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지니와 폴/빌리에 드 릴아당(Villiers de Lisle-Adam, 1838~1889, 프랑스)

 

18세기 인도양 한가운데 있는 섬 일드 프랑스(지금의 모리셔스)에 달콤한 사랑에 빠진 폴과 비르지니라는 선남선녀가 살고 있었다. 평민 집안의 아들이었던 폴과 달리 비르지니는 부유한 귀족 집안의 딸이었다. 평민과 귀족이라는 신분 차이도 이들의 사랑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두 집안은 신분 차이를 넘어 스스럼없이 지냈고 폴과 비르지니도 마치 친남매처럼 지내며 성장했고 점차 나이가 들면서 둘은 사랑의 열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귀족 집안이었던 비르지니는 정식 교육을 시키고 재산을 상속시키겠다는 백모의 부름을 받고 본국인 프랑스로 떠나게 되었다. 비르지니는 폴만 섬에 남겨두고 떠나는 게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주위의 끈질긴 설득에 폴에게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섬을 떠났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고 약속대로 비르지니는 다시 섬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비르지니가 탔던 배가 섬 가까이에서 그만 폭풍우를 만나 침몰해 버리고 말았다. 다행이 침몰 지점이 섬에서 가까워 대부분의 승객들은 헤엄을 쳐서 구조를 받았지만 비르지니는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옷을 벗는 게 부끄러웠던 것이다. 죽은 비르지니의 손에는 폴의 초상이 꼭 쥐어져 있었다고 한다.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Bernardin de Saint Pierre, 1737~1814, 프랑스)가 1787년에 발표한 소설 <폴과 비르지니>의 줄거리다.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만 폴과 비르지니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옷을 벗는 게 죽음보다 더 부끄럽고 두려웠을까? 요즘 시각으로 보면 선뜻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소설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상징이 된 이유는 충분히 납득할 만 하다. 하지만 거의 한 세기 후에 발표된, 이름 순서만 뒤바뀐 소설 한 편에 다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 빌리에 드 릴아당이 1874년에 발표한 소설 <비르지니와 폴> 때문이다. <폴과 비르지니>보다 더 감동적인 사랑을 보았기 때문일까? 어쨌든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젊은 연인, 비르지니와 폴의 밀회를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피에르 오거스트 코트의 그림 '폭풍'. 피에르의 소설 <폴과 비르지니>에서 영감을 받고 그렸다는 설도 있다.

사진>구글 검색 

 

헤어진 지 수년이 지나도록 당신의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둔 그 추억은, 귀중한 유리병 속에 넣어둔 동양의 향유 한 방울과도 같다. 그 향기는 너무도 섬세하고 강렬해서, 그 병을 당신의 무덤 속에 넣어두면, 은은하고 영원한 그 향기는 당신의 육신의 먼지보다 더 오래 남아 있으리라. -<비르지니와 폴> 중에서-

 

사랑의 추억을 '동양의 향유 한 방울'에 비교한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지금은 어린 소녀들의 기숙학교가 된 수도원 철책의 기둥을 사이에 두고 열 다섯 살 젊은 연인의 밀회를 지켜보고 있다. 소녀의 이름은 '비르지니', 소년의 이름은 '폴'. 하지만 두 천사가 사라진 뒤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고 만다. 두 천사, 젊은 연인의 대화가 문제였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양의 향유 한 방울'처럼 은은하고 영원한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밀회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청춘 남녀들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지극히 실망스러웠다. 이 젊은 연인에게는 사랑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짧막하게 옮겨보면 이렇다.

 

"3년 후에 우리는 결혼하게 되겠죠? 당신이 시험에 붙기만 하면 말이에요. 폴!"

"그래요. 그렇게 되면 나는 변호사가 되는 거죠. 변호사가 된 다음 몇 달 후엔 금세 유명해질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돈을 벌게 되겠죠."

 

"폴, 폴, 그러면 좋지 않아요. 그 고모님한테는 언제나 아주 상냥하게 대하고 비위도 잘 맞춰 드려야 해요. 고모님은 늙으셨으니까 언젠간 우리에게도 유산을 조금 남겨 주실 거예요."

 

"물론 좋지요. 폴! 엄마가 저에게 결혼 지참금으로 농장이 있는 시골의 작은 집을 주실 거예요. 그럼 우리 가끔 그곳으로 여름을 보내러 갈 수도 있을 거예요. 그리고 할 수 있으면 그 집을 조금씩 늘려 봐요. 농장에서도 수입이 좀 들어오겠죠." -<비르지니와 폴> 중에서-

 

릴아당이 피에르의 소설을 이름 순서만 바꾼 게 아니었다. <폴과 비르지니>의 순수한 영혼은 <비르지니와 폴>에서는 세속적인 인물로 바뀌었다. 아마도 산업혁명 이후 팽배해진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를 비꼬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순수한 가치보다는 돈으로 평가되는 사랑의 몰락을 저자는 눈물을 흘릴만큼 슬프고 안타까웠는지도 모른다. 불과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사랑의 가치가 이렇게 변질됐는데, 20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의 사랑은 어떤 의미일까?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게 아니 시대에 맞게 변하는 게 사랑이라지만 그 순수하고 맑은 가치만은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게 또 사랑이 아닐까? 

 

어쩌면 '갑돌이와 갑순이'도 이제는 '갑순이와 갑돌이'로 바뀌었고, '철수와 영희'도 '영희와 철수'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눈물을 흘릴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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