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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기축옥사 담당 위관 논쟁, 유성룡인가 정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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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인가 정철인가/오항녕 지음/너머북스 펴냄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기축옥사! 게다가 장원급제하여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주옥같은 가사를 남겨 한국 문학사에서 우뚝 선 문장가이면서, 관찰사로 민생 안정에 주력하였던 청백리 송강 정철.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난국을 수습하였으며 그 7년의 경험을 <징비록>이라는 책으로 남겨 후세를 경계한 경세가였던 서애 유성룡. 선조 연간의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두 분이 사건의 당사자로서 함께 겪어야 했으나, 두 분이 돌아가신 뒤에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엉키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엉킨 기억의 당사자가 되었다. 사건에 대한 기억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 책은 그 사태에 대한 탐구이다.

이 엇갈린 기억의 진실을 추적하기 위해 저자는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광해군일기』 등의 연대기 자료는 물론 관련 인물들의 문집을 세세히 검토했다. 『기축록』 등 기축옥사에 대한 야사도 빼놓지 않았다. 나아가 그 사건 이후 사람들의 기억과 증언도 추적하였다. 가까이는 지금부터 100년 전 매천 황현의 기억에서, 300년 전의 이현일, 박광일 그리고 400년 전 안방준의 기억과 기록까지. 이 기억의 변주는 몇 굽이를 돈다.


사건 발생에서부터 선조 후반까지 정철이 위관이었다는 주장(이하 ‘정철 위관설’)은 제기되지 않았다. 광해군 초반에 ‘정철 위관설’이 처음 제기되었다가 반박을 받고 잠복했다. 인조반정 이후 이발, 정철 등의 복권으로 정리되는 듯하다가 숙종 초반 예송논쟁 이후 다시 제기된다. 이 역시 1680년(숙종 6)의 경신환국으로 다시 ‘유성룡 위관설’로 바뀌었다가 기사환국으로 장희빈이 왕비가 되고 남인이 진출하면서 다시 ‘정철 위관설’이 고개를 들었다. 장희빈이 쫓겨나면서 ‘정철 위관설’은 단지 일각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가, 이덕일의 입을 빌어 다시 등장한 것이다.

 

 

기억의 차이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역사학의 아포리아다. 그러나 역사학은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시작한다. 그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과거를 찾고 다시 질문을 던진다. 저자에게 역사학이란 “해당 사건에 대한 증언, 관찰, 의견, 정황을 다시 따져보면서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증거와 추론을 제시하는 힘겹지만 재미있고, 지루하지만 고무적인 결과를 남겨주는 매력적이고 숭고하기까지 한 과정”이며 그것이 이 책을 쓴 이유라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밝히는 ‘유성룡 위관설’과 ‘정철 위관설’의 결론 및 의미는 이렇다.

첫째, 이런 기억의 혼란 또는 변주는 무엇보다 기록의 부재에 기인한다.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기축옥사에 대한 사건 진술, 심문, 판결 등이 적힌 추안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라진 기억, 변형된 기억이 생겨났다. 둘째, ‘기억 투쟁’이라고까지 부를 만한 상이한 기억은 멀리는 4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들이나 손자 같은 후손들이 각자 당시 위관은 정철이 아니었다, 유성룡이 아니었다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누군들 자기 조상이 억울한 누명을 썼는데 편하겠는가. 그러나 동시에 그런 태도가 기억의 왜곡을 온존시켰을 수도 있다. 셋째, 『선조실록』,『광해군일기』를 검토하면 이발 노모와 아들이 죽은 것은 신묘년(선조 24)으로, 위관은 유성룡이나 이양원이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정확히 말하면 『선조실록』과 『광해군일기』(중초본)에 따르면, ‘정철 위관설’은 부정된다. 넷째, 『선조실록』에서 이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기사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를 통해 검토한 결과, 적어도 선조 27년경에는 ‘정철 위관설’이 나타나지 않았다. 광해군 원년까지도 그러했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정철 위관설’은 어떤 곡절을 거쳐 숙종 초반 예송 논쟁 시기에 등장한 것이다. 다섯째, 누구도 기축옥사에서 정여립의 모반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발 형제, 최영경 등의 죽음은 억울하다, 지나쳤다고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이 공통분모이다. 여섯째, 위관이 유성룡(이양원)이었는지 정철이었는지 논의에서 결정적으로 빠진 것이 있는데 이 점이 앞의 다섯 가지 정리보다 훨씬 중요한 대목이다. 바로 추국청이라는 공간, 추국청이라는 제도이다. 추국청은 위관 - 추국청 당상 - 낭청으로 구성된 조직으로, 최종 결정은 국왕이 내리는 반역사건 등 조선의 주요 범죄를 다루는 제도였다.

기축옥사 당시(또는 내내) 유성룡과 정철은 의정(議政), 곧 정승이었다. 두 사람뿐 아니라 심수경도 우의정으로 위관을 맡았으며, 이산해 역시 영의정이었고, 이양원도 우의정으로 위관이었거나 추국에 깊이 간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기축옥사 초반에는 선조가 직접 친국을 했다. 더구나 이 사람들 대부분 기축옥사를 다스린 뒤 상을 받았다. 기축옥사는 의금부 단독 추국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어떤 당색 일각에서는 누군가 기축옥사를 조작한 듯이 말했지만, 남인, 북인, 서인 등 여러 정파가 함께 참여하는 추국청에서는 누구 혼자 사건을 조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거기에 더하여,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이 완전하지 못한 인간을 심문하고 처벌하는 형벌 제도가 한몫을 담당했다.


결국 위관이 정철이든 유성룡이든 ‘유성룡인가 정철인가’라는 질문은 제도로서의 추국청의 존재를 도외시한 질문이다. 저자는 그 배후에 역사적 사건을 ‘콩쥐-팥쥐’ 쯤으로 여기는 단순하면서도 게으른 관점, 즉 ‘당쟁론’이 숨어 있다고 단언한다.


기축옥사를 접근할 때 여전히 쉽게 당쟁론에 빠져 서인-동인의 감정싸움에 편승한 권력욕이 빚어낸 사태의 하나로 설명한다고 저자는 지적하며, 당쟁론은 “결국, 어떤 사건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인 객관적 조건, 자유의지, 우연 중 하나만 가져와서, 마치 그것이 그 사태의 원인인 듯 이해하는 안이한 태도”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 하나란 바로 권력욕, 묵은 감정, 원한 등과 같은 인간의 의지에 속한다. 당쟁론자들이 역사를 설명하면서 사안이나 인물을 쉽게 재단하고 비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누군가의 의지나 욕망이 사태의 원인이라고 보면 결과에 대해서도 도덕적 잣대가 작동하기 마련이다.


기실 당쟁론에서 보여주는 의지라는 것도 선의는 없고 악의적으로 채색되거나 각색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마치 독심술이라도 하는 양 당대 사람들의 의도를 추측하는 역사서술은 올바른 역사 탐구 태도라고 할 수 없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나아가 저자는 한국 정치사에 대한 당쟁론적 접근의 한계를 식민사관이라는 평면적, 감정적 비난과는 다른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당쟁론이 식민사관이기 때문에 그르다는 주장은 일견 맞는 듯하지만 매우 불완전한 논리이다. 당쟁론이 식민사관의 산물이라는 인식 자체가 안이한 것이다. 식민사관이 식민지 통치를 위해 왜곡된 역사상을 만들어내는 데서 당쟁론이 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 강점기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당쟁론은 있어왔다.
그렇다면 당쟁론은 식민사관의 특수한 논리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인식의 결여를 보여주는 어떤 사유 또는 접근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권력의 배분, 정책의 결정과 시행, 사회와 나라의 비전을 다루는 정치사를 인간의 의지나 욕망만을 잣대로 서술하고 설명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 오류의 하나인 것이다. 역사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당쟁론은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기에는 근본적으로 편협하고 비논리적인 시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당쟁론은 역사학자의 단순함과 게으름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등장할 수 있다.”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알고 있는 사실이 있을 때, 갈등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풀지 그런대로 양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풀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이 책이 서로 다른 기억을 함께 양해하며 풀 수 있으리라는, 서로 둘러 앉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썼다고 소회한다.

“역사에는 얼마나 많은 갈등의 기억이 있을까? 감히 역사 공부가 상처와 갈등을 어루만질 수 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갈등을 부추기고 상처를 내는 역사 공부는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춘추필법이 아니라고 나를 탓한다면, 달게 받겠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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