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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엉망진창 정치판, 사람 탓일까? 제도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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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 속의 여우/에프라임 키숀 지음/정범구 옮김/삼인 펴냄

 

<개를 위한 스테이크>,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편> 등으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에프라임 키숀의 풍자 소설이 도서출판 삼인에서 출간되었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유대인 작가 키숀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박해의 산증인이자, 이스라엘의 사랑을 받은 국민적 작가이다.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선보이며 사랑받은 키숀은, 특히 재기 넘치는 ‘말장난’으로 유명했다. 작가는 <닭장 속의 여우> 곳곳에 이 같은 장치를 심어 놓고 독자들을 맞이한다.


<닭장 속의 여우>는 정치판에서 닳고 닳은 두 명의 도시인이 순박하고 무지한 시골 사람들을 휘두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고 키숀이 마을 사람들을 순수하기만 한 피해자로 다루는 것은 아니다. 키숀의 ‘모두 까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깨끗하면 깨끗하기 때문에, 무지하면 무지하기 때문에, 교만하면 교만하기 때문에 인간성을 털리고 조롱당한다.


마을 사람들은 소설 초반에는 도시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점차 ‘성장’한다. 그리고 절정에 다다를 때쯤이면 ‘여우’를 닭장 속에 가두는 반전을 일으키는 데까지 ‘발전’한다. 키숀은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질시, 음해, 증오와 같은 화학 작용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인간상처럼 다룰 뿐이다. 등장인물들은 처음 만나는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가다듬는 데 공을 들이고, 그러는 동안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완전히 뒤바뀐다. 키숀은 이 과정을 그려 내며 쉴 새 없는 말장난을 곁들인다. 특히 유대교 관습을 비롯한 종교적 소재를 이용해 자아내는 웃음은 곱씹을수록 감칠맛이 난다.

 

 

건강상의 이유로 킴멜크벨에 요양차 온 주인공 ‘둘니커’는 정치판에서 날고 긴 세월이 50년에 가까운 정치인이다. 본인 이야기로는 온갖 말 못 할 고생을 딛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하지만, 사실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앞에 앉은 이가 누구인지에 따라 나이도, 경력도 멋대로 바꾸어 말하는 둘니커는 우리가 혐오하는 ‘정치인’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를 보좌하는 청년 ‘체프’는 이 노쇠한 정치인을 보살피며 비서 일부터 연설문 대필까지 온갖 업무를 맡아 한다. 뒤에서는 둘니커를 흉보기 일쑤지만, 명망가의 그늘을 떠날 생각은 없다. 두 사람은 다퉜다가도 필요에 의해 화해하고,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 속에서 같은 입장임을 확인하고 진한 우정을 나누기도 한다. 늘 싸우면서도 공통된 이해관계 앞에서는 손잡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런 모습은 정치권을 연상시키는 장면이기도 하다.

 
전기도, 신문도 들어오지 않는 킴멜크벨에 도착한 둘니커는 자신의 유명세를 몰라보고 짐짝 취급하는 마을 사람들의 ‘야만성’에 치를 떤다. 그는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사유 재산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로 인한 차별 또한 없는 이 마을을 ‘선진화’하기로 마음먹는다. 둘니커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필요한 물품들을 받아 적어 협동조합에 건네는 이발사에게 ‘읍장’이라는 이름표를 달아 주고, 이동 수단을 선사한다. 소 먹이나 실어 나르는 마차에 타라는 말이냐고 반문하던 이발사는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 앉아 내려다보는 맛에 빠르게 중독되고, 이를 시기하는 경쟁자들이 하나 둘 생기면서 평화롭던 마을에 불편한 기류가 형성된다. 이 기류는 마을 평의회를 건설하고 허울뿐인 여러 직책을 낳는다. 둘니커는 초보 정치가들의 다툼을 지켜보며 정치적 황야에서 이루어 낸 업적을 만끽한다. 읍장이라는 직위는, 권력은 물론 사소한 욕심과도 거리가 멀었던 킴멜크벨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차기 읍장 자리를 차지하려는 싸움에 열중한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며 주먹을 쓰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온 거리가 서로를 헐뜯는 말로 난무하고 날이면 날마다 폭력 사태가 벌어지는 와중에, 둘니커와 체프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키숀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킴멜크벨이 망가진 것은 사람들이 정치를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탐욕스러운 인간의 본성 때문일까? 읍장도 없고, 평의회도 없던 킴멜크벨의 지난날은 무지했을지언정 평화로웠다. 이제 사람들은 핏발 선 눈으로 단상에 올라 연설을 하고 전략적인 선전전을 펼친다. 권력을 향한 탐욕은 마을에 끔찍한 재앙을 불러오고, 모든 것을 한순간에 쓸어버릴 홍수가 킴멜크벨에 도래한다.


<닭장 속의 여우>는 1970년대에 쓰인 소설이다. 몇 십 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서글프게도 우리의 지금과 무척 닮아 있다. 정치인들은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보다 권력으로 욕심을 채우는 일에 관심이 더 많고, 사람들은 그런 행태에 환멸을 느껴 정치 자체를 혐오하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그런 혐오감이 큰 독자일수록 이 소설을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매일 뉴스에서 쏟아지는 정계의 싸움 소식이 지긋지긋할 때, 유쾌한 작가 키숀과 농담을 나누어 보는 것은 어떨까. 엉망진창인 현실을 버티게 만드는 풍자의 힘을 느낄 수 있을 테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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