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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너의 세계, 서로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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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세계/최양선(1974~) 지음/창비 펴냄

 

최양선 장편소설 <너의 세계>가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 63권으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제1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과 제16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한국 아동문학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작가 최양선의 첫 번째 청소년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새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문학 세계를 다시 한 번 선보인다. <너의 세계>는 2034년 철저한 계급 사회로서 뛰어난 과학 기술을 발달시킨 엘리시온 행성과 자연이 파괴되어 피폐해져 가는 지구 알래스카를 주 무대로 하는 SF다. 근미래를 다루는 과학소설이지만 기술적 진보를 현란하게 묘사하기보다 ‘서로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법’이라는 서정적 주제를 아름답게 풀어내 잔잔한 감동을 전한다. 엘리시온에서 지구로 인간의 영혼 물질을 찾으러 온 17세 주인공 ‘시오’와 알래스카에서 외로이 살아온 소녀 ‘타냐’의 만남은 사랑의 근본적 속성에 관한 진지한 사유를 불러일으키며 가슴을 적신다.
 

문득 우주 어느 별에도 나처럼 스스로 위로하고 보듬는 존재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에게 이름을 붙여 주고 싶었다. 어느덧 내 안에 시오의 세계, 엘리시온이 담겼다. 그 세계는 현재이면서 미래 같고, 미래이면서 과거 같은 곳이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지구와 놀랍도록 닮은 행성, 엘리시온에 숨겨진 비밀은?  

 

 

지구에서 수백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자리한 행성 엘리시온. 이곳에 사는 엘리시안들은 지구와 지구인을 완전체로 추앙하며, 뛰어난 과학 기술을 이용해 눈과 얼음으로 둘러싸인 척박한 환경을 지구처럼 풍요롭게 바꾸려 한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유전 물질을 정기적으로 충전받아 외모도 인간과 비슷하게 탈바꿈하려 한다. 그러나 밝혀지지 않은 미세한 차이 때문에 아무도 완벽한 인간이 되지는 못하고, 인간처럼 심오한 정신세계를 소유하지도 못한다. 17세의 엘리시안 시오는 최초로 인간 영혼을 소유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지구로 탐사를 떠나지만, 알래스카 소녀이자 샤먼인 타냐와 만나면서 영혼은 물질이 아니고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타냐와 함께할 때면 가슴이 저미고 손끝이 떨리는 시오. 이 낯선 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주에서 가장 안정된 낙원을 지향하는 엘리시온에 숨은 비밀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이기적인 소유욕으로 가득 찬 허상의 공간, 이곳에서도 구원을 노래할 수 있을까?

 
전작 <지도에 없는 마을>에서 소비 문명과 인간의 집착을 묘사한 최양선 작가는 이 작품에서 더욱 깊은 주제의식을 펼쳐 보인다. 엘리시온에서는 공기나 물 같은 자연의 일부조차 누군가의 재산이고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다. 겉으로는 낙원이라 칭하지만 철저하게 계급적 이해관계로 돌아가는 세계가 바로 엘리시온이다. 작가는 이러한 엘리시온의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를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라는 소재를 통해 극대화시키면서 인간과 물질 관계에 깊이 천착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과학 문명을 비판하거나 절망적인 미래를 예언하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자기 신념에 따라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한 인물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려 내어 자칫 상투적이 되기 쉬운 메시지를 문학으로 승화하고 작품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특히 엘리시온에서 지구로, 그리고 다시 엘리시온으로 귀환하는 여정 속에서 성장하는 주인공 시오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시오는 체제 순응적인 교육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이에서 호기심과 질문을 품는 소년으로 변화하고, 가면을 벗은 엘리시온의 진실과 마주한 뒤부터는 세상을 바꾸려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은 무기력해 보였다. 표정에 생기도 없고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는 듯했다. 시오 역시 문득문득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 들곤 했다. 시오는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타냐를 떠올렸다. 그러면 심장이 빠르게 뛰며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시오는 중요한 결심을 했다. 자신이 지구에서 경험한 일들을 다른 노동자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본문(242면) 중에서-

박진감 있는 서사 속에서 하나씩 드러나는 엘리시온의 비밀은 어둡고 추악하다. 그렇기에 기존 질서에 맞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시오를 더욱 응원하게 된다. 지구와 놀랍도록 닮은 엘리시온, 그곳에도 구원의 노래가 울려 퍼질 수 있을까?
“내 기억은 여전해. 난 사라지지 않은 거야.”

우리가 결코 잃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다채로운 변주


작품에 흐르는 서정성에도 주목할 만하다. 간결한 문장과 군더더기 없는 스토리텔링, 뚜렷한 기승전결을 보이면서도 이 소설은 섬세한 감수성이 살아 있으며 아름답고 절실하다. 고대 이집트의 영혼 불멸 사상과 알래스카 샤먼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 최양선은 누군가 죽은 후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기억이 이어질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그러므로 사랑의 기억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전한다. 작가의 이러한 세계관은 ‘타냐’라는 인물을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타냐는 인간뿐 아니라 식물과 동물도 소중한 생명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메시지는 인공적인 자연 환경에서만 살아온 시오의 마음을 움직인다. 시오는 자연과 교감하는 타냐를 보면서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숲은 칠흑 같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시오와 타냐는 무릎 위에 담요를 덮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오는 타냐의 옆모습을 보았다. 타냐는 예뻤다. 좋은 유전자 덕에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몰리스의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미의 기준을 넘어서는 어떤 생기가 타냐를 빛나게 했다. -본문(163면) 중에서-

이 소설 속 타냐와 시오의 만남은 단순히 외계인에 대한 동경을 넘어 사랑의 기본적인 속성이 ‘서로 다른 존재’를 향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생명의 불꽃이 꺼져 가는 새끼 곰을 품에 안은 어미 곰의 애틋한 사랑, 아들의 죄를 덮으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아버지의 사랑, 잠들어 있던 영혼을 일깨운 소중한 첫사랑 등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사랑의 변주는 가슴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알래스카의 쓸쓸하고 스산한 풍경에 대한 작가의 세밀한 묘사는 가문비나무의 마른 잎사귀와 풀을 뜯는 무스의 평화로운 움직임까지 선명하게 담아내 서정성을 북돋운다. <너의 세계>는 우리가 잃을 수 없고 잃어서도 안 될 사랑을 노래하며 깊은 울림을 전한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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