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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따따부따

명화 '부엌 풍경'이 심장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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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전자전이라더니 모전여전도 이에 못지 않은 모양이다.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는 유럽 최고의 왕실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로 카를 6세의 장녀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토스카나 대공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했는데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합스부르크가의 모든 영토를 상속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각국이 이 상속에 이의를 제기하여 오스트리아 계승전쟁(1740~1748)이 발발하고 말았다.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전쟁으로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넘겨주었으나 영국과 손을 잡고 아헨조약(1748)을 체결해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이란 영토를 상속받을 남자 상속인이 없을 경우, 통치자의 딸이 상속하며 딸도 없을 경우에는 누이가, 누이도 없을 경우에는 고모가 상속하도록 하는 살리카법을 폐지하고 준살리카법으로의 전환을 규정한 법령이다.

 

남편인 프란츠 1세의 무능으로 모든 국정을 담당한 그녀는 이후 재정 재건과 군사력 증강에 집중해 프로이센에게 빼앗겼던 슐레지엔을 회복하기 위해 7년 전쟁(1756~1763)을 일으켰으나 손을 잡았던 영국이 등을 돌리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이 사망한 이후부터는 아들 요제프 2세와 공동통치를 하기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였던 카를 6세는 가정적인 교육에 집중해 그녀가 얌전한 여성으로 성장하길 원했지만 마리아는 정치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한 시대를 풍미한 여장부가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는 유별난 금슬로도 유명했는데 자녀를 무려 16명이나 두었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이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이 정도면 역사상 최고의 모전여전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게다가 이 모녀의 운명 또한 모전여전이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사치와 낭비로 국고를 탕진한 죄와 반혁명죄로 처형당한 마리 앙투와네트였다면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사후 그녀의 심장이 그림에 쓰이는 염료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문제의 그림은 프랑스 화가 마르탱 드롤링(Martin Drolling, 1752~1817)의 '부엌 풍경'이라고 한다.

 

▲ 마르탱 드롤링의 '부엌 풍경'. 1815년. 사진>구글 검색

 

프랑스 미술 전문지 보자르(Beaux-arts)의 특집 기사 '예술계의 믿기 힘든 30대 불가사의'에 따르면 프랑스 루브루 박물관에 전시된 19세기 그림 중에 일부가 프랑스 왕과 왕비의 신체가 녹아있다는 것이다. 보자르는 루이 14세의 심장과 마리 앙투와네트 왕비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심장이 모두 물감 재료로 쓰였으며, 이런 재료로 그려진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세기 프랑스 화가 생 마르탱(Saint-Martin)과 마르탱 드뢸링의 작품들을 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던 해인 1793년 혁명정부는 건축가 프티 하델에게 루이 13세, 루이 14세는 물론 역대 왕자와 공주 등 왕족의 시신을 모두 없애라고 명령했다. 특히 이들 왕족의 신체 일부, 심장이었는데 성난 민중들이 왕족 무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수습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하델은 혁명 정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친구인 생 마르탱과 마르탱 드뢸링에게 수습된 왕족의 심장을 미라로 만들 것을 제안했고 두 사람은 미라 대신 수습된 심장을 갈아 기름과 함께 안료를 섞어 글라시(glacis)를 위한 왁스로 만들었다.

 

글라시는 밑그림이 마른 뒤 투명물감을 덧칠하는 회화 기법으로 그림의 윤기와 깊이감을 더해주는 효과가 있어 당시 화가들이 널리 사용했다고 한다. 보자르는 마르탱 드뢸링의 대표작 '부엌 풍경'(1815년)을 프랑스 왕과 왕비의 심장이 녹아있는 작품으로 꼽았다.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 기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절대왕정에 대한 프랑스 민중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한 것 같다.

 

마르탱 드뢸링은 19세기 프랑스 화가로 당시로는 성공한 여성 화가로 유명했던 미셸 마르탱 드뢸링과 루이스 드롤링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부엌 풍경'은 마르탱 드롤링이 1815년에 그린 그의 대표작으로 1817년부터 르부르에 전시되고 있다. 마르탱 드롤링은 대중에게 친숙한 주제와 풍경을 주로 그렸는데 그의 작품들은 활동 당시에도 유명세를 떨쳤고 작품 중 상당수가 석판화에 새겨졌다. 1827년 마르탱 드뢸링이 죽은 후 루브르 박물관은 그의 작품 중 '부엌 풍경' 외에 '창가의 여인'과 '바이올린 연주가'를 추가로 전시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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