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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따따부따

주윤발, 영웅의 본색을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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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 하나면 어떤 경우건 상황 종료였다. 쌍권총이면 수십 대 일, 수백 대 일도 무의미했다. 비겁하게 숨어서 총을 쏘지도 않았다. 총알이 빗발치는 한 가운데를 여유롭게 걸으면서 적들을 제압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총알이 빗발치 듯 했지만 죄다 빗겨 나갔다. 권총 하나에 총알이 몇 발이 들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탄창 한 번 갈아 끼우지 않고 수없이 발사됐다. 그 와중에 담배까지 물고 있었으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 덕에 학교 교실은 온통 전쟁터였고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드는 총알 사이를 빗 사이로 막 가는 영웅이었다. 맞다. 그는 영웅이었다. 영웅이었고 우리들의 우상이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 건너와서는 "사랑해요, 밀키스" 한 방으로 남심을 요동치게 했고 여심을 흔들어 놓았다. 그는 바로 홍콩 영화배우 주윤발이었다.

 

학창 시절 주윤발은 우상이자 영웅이었다

 

내 나이 또래 성인들에게 주윤발을 빼면 학창 시절의 추억이 절반은 줄어들 것이다. <와호장룡>, <첩혈쌍웅>, <영웅본색> 등 그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들은 수업은 빼먹는 한이 있더라도 꼭 봐야했다. 브룩 쉴즈,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가 막 사춘기에 접어든 우리를 이성에 눈 뜨게 했다면, 주윤발은 남자답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남자는 어떤 시련과 마주하더라도 과감하게 불의에 맞서고, 끝까지 사랑을 지켜야 했다. 당시 홍콩 영화배우로 유덕화, 장국영, 성룡, 이수현 등도 있었지만 주윤발만큼 강력한 한 방은 없었다. 내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만큼 그도 이제 늙었다. 하지만.

 

▲주윤발. 사진>구글 검색 

 

왕년의 우상은 죽지 않았다. 우리 나이로 환갑에 접어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우상이고 영웅이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의하면 주윤발을 포함한 47명의 홍콩 스타들이 중국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주윤발과 성룡이 쿵후 대결을 벌인다면 누가 이길까 하는 황당한 질문으로 기사를 시작했다. 신문은 그러면서 확실한 결과는 알 수 없지만 홍콩 시민들은 오랫동안 중국 공산당 후원자였고 민주주의에 비판적이었던 성룡과 홍콩 민주화 운동인 우산 혁명을 응원한 주윤발 중 어느 한 쪽만을 지지할 것은 분명하다고 보도했다.

 

우산 혁명을 지지한 주윤발, 왕년의 우상은 죽지 않았다

 

주윤발이 중국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그가 출연한 영화들이 중국 본토에서 상영이 금지된 이유는 바로 그가 홍콩 민주화 운동을 지지한다는 것 때문이다. 수입의 80% 이상을 중국 본토에서 버는 주윤발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돈을 덜 벌면 되지(I’ll just make less then)" 하며 중국 정부를 조롱했다고 한다. 영웅다운 쿨한 대답이다. 그는 애플 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홍콩 민주화 시위에 대해서 "평화 집회였기 때문에 최루탄을 사용할 어떤 이유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우산 혁명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 블랙리스트에 오른 스타는 주윤발 말고도 <지존무상>의 유덕화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故신해철. 사진>다음 검색

 

심지어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이들 홍콩 스타들에 대해 "우리가 차린 음식을 먹으면서 동시에 그릇을 깨지 말라(Don’t think that you can eat our food and smash our pots at the same time)" 경고했다고 한다. 사실 우산 혁명을 지지해서 중국 정부 블랙 리스트에 오른 홍콩 스타들 중 일부는 중국 본토에서의 기존 스케줄이 취소되었다고 하니 21세기 초강대국 중국의 위상을 감안하면 옹졸하기 그지 없다. 신문은 주윤발이 "내가 만난 시위대와 학생들은 용감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며 "학생들은 이성적이다. 정부가 홍콩 시민들과 학생들이 만족할 만한 대책을 내놓는다면 이 위기는 끝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주윤발 관련 기사를 보면서 묘하게 겹치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며칠 전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신해철이다. 주윤발이 중·고등학교 시절 만났던 우상이자 영웅이었다면 신해철은 성인이 되어서 알게 된 경우라 우상이니 영웅이니 하는 표현은 좀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스타 중 한명이었다. 신해철만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 연예인도 드물 것이다. 이 말은 신해철이 그만큼 할 말은 한 스타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더욱이 그는 강자와 권력 편이 아닌 늘 약자와 대중의 편에서 독설 아닌 독설로 가렵고 불편한 부분을 긁어주곤 했다. 단순히 할 말을 하는 스타였기 때문에 좋아했던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어떤 분야건 연예인이 이미지 관리만 잘 하면 꾸준히 스타로 인정받을 수 있고 꽤 많은 돈도 벌 수 있었을텐데 굳이 사회 현실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때로는 불의를 보고도 참아야만 하는 것이 연예인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것이다. 어쨌든 신해철 이후 많은 스타들이 불의한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은 신해철이 가수로서만이 아니라 공인 내지 오피니언 리더로서 남긴 큰 유산이 아닐까 싶다. 주윤발도 이제 늙었다. 과거의 빛나는 외모도 어느덧 보통 사람들이 늙는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다수의 약자 편에서 할 말을 다 하는 그의 모습에서 왕년의 우상은 죽지 않았다는 확신을 준다. 먼 훗날 내가 나이가 들어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도 '우리의 우상, 우리의 영웅'으로 추억되길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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