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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비가 그치고 나면 하늘에 뭐가 뜨는지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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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는 언제 뜨는가/윤흥길(1942~)/1979년

 

어린 시절 어느 동네나 '광녀' 이야기 하나쯤은 있었다. 어줍잖게 왠 한자라고 한다면 소설 속 그대로 '미친년' 이야기라고 하겠다. 그래도 어감 때문에 불편해 한다면 조금 순화(?)시켜 '미친 여자' 이야기로 하겠다. 어쨌든 불쑥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내용이야 동네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때로는 사실로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게다가 '미친 여자' 이야기의 배경에는 늘 '비오는 날'이 깔려 있었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에도 '미친 여자' 이야기가 존재한다. 아니나 다를까 비오는 날이면 나타났다. 특이한 점은 온종일 빗 속을 걸어다니면서 노래(아마도 판소리 창이었을 것이다)를 불렀는데 그 수준이 듣는 이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술상머리에서 거나하게 취해 부르는 젓가락 노래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대체 그 '미친 여자'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길래 비만 오면 거리를 쏘다니며 그렇게 멋지게 한 가락 뽑고 다녔을까? 그 때도 그랬지만 기억을 더듬을 때마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네를 막론하고 전설처럼 내려오는 '미친 여자' 이야기에서 꼬여버린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존재했을지도 모르겠다. 왜 '미친 남자' 이야기는 없었을까? 왜 하필 그런 이야기에 여성만 등장하는 것일까? 사회적 약자로서의 현실과 상징성 모두를 포함한 대상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이나 재난과 같은 상황에서 여성은 아동과 함께 극도의 참상을 고스란히 감당해내야만 하는 부류이기도 하다. 생물학적 약자라기보다는 사회적·정치적·관습적 약자가 여성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에는 여성에 대한 아주 오래된 편견과 고정관념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윤흥길의 소설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도 주변에서 흔히 들었던 '미친 여자'의 이야기다. 기막힌 역사적 사건을 겪은 후 정신줄을 놓아버린 주인공 당숙모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편견과 고정관념의 문제들을 과감하게 들춰낸다. 과감하다고 표현한 것은 독재와 반공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발표된 소설이기 때문이다. 

 

▲사진>구글 검색 

 

이야기를 간략하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한국 전쟁 당시 낮에는 태극기, 밤에는 인공기를 걸어야만 살 수 있었던 어느 산간 마을에서 도망치는 빨치산들에 의해 일가족일 몰살당했다. 이 집 안주인이었던 여자는 측간 똥통에서 남편과 자식들이 참혹하게 죽어가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만 정신줄을 놓고 만다. 이 '미친 여자'가 바로 주인공의 당숙모다. 이름도 뜻도 몰랐던 이데올로기의 홍위병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피의 복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빨치산이 물러간 마을에서 이번에는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또 한 가족이 몰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진다. '미친 여자'였던 당숙모는 이 참극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젖먹이를 데려다 제 자식처럼 키운다. 이 아이가 바로 동근이다. 처음에는 이름도 없었지만 국민학교에 입학할 즈음 동근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차씨였던 동근이는 비로소 주인공의 김씨 집안의 호적에 정식으로 오르게 된다. 하지만 데려온 자식에 대한 집안 어른들의 차별은 끊이지 않았고 결국 동근이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한다. 이런 동근이가 훗날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김씨 종중의 제사에도 나타나 넙죽넙죽 절을 한다.

 

소설은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당숙모와 동근이의 기막한 사연을 풀어나간다. 복수와 복수에 대한 복수의 끊임없는 참극이 벌어졌던 한국 전쟁의 참상은 아이의 눈을 통해 더욱 비극적으로 그려진다. 주인공 '나'가 밤을 두려워 했다는 고백에서는 전쟁이 가져다 준 공포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나는 밤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밤의 어둠을 끔찍이도 무서워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진 뒤로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죽음들이 밤중에 이루어졌다. 외삼촌의 전사 통지가 온 것도 밤중이었고 삼촌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새벽녘에 가까운 한밤중이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의 공포가  강둑 위에서의 학살이나 빨치산의 습격도 대개 야음을 틈타 저질러졌으며 그것에 대한 보복 또한 어둠 속에서 저질러졌다. 새벽은 다만 간밤의 죽음들을 우리에게 똑똑히 확인시키기 위해서만 찾아오는 것 같았다.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 중에서-

 

 

저자는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오히려 전쟁을 포함한 아픈 시대의 유물과 상처를 치유하는 데 그 촛점을 맞추고 있다. '무지개'는 저자의 이런 의도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소재라고 할 수 있다. 맑은 날만 지속된다면 끝끝내 볼 수 없는 자연현상이 무지개다. 무지개는 먹구름이 깔리고 이후 비가 세차게 내리고 난 다음 갠 하늘에서만 볼 수 있다. 당숙모와 동근이의 인생이 그랬듯이 먹구름과 비바람 같은 험난한 인생이었지만 결국에는 판사가 되고 종중 제사에도 떳떳하게 참석할 수 있게 되었으니 무지개는 팍팍한 인생 어딘가에 존재할 희망의 빛인 것이다. 한편 무지개는 일곱 색깔의 조화로 구성된다. 실제 무지개 색깔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한다. 어쨌든 일곱 색깔 조화의 산물인 무지개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다양성 속으로 포용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빨갱이 자식, 미친 여자가 키운 자식,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무늬만 가족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동근이의 당당한 종중 제사 참석으로 희석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하기에는 섣부른 속단이다.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자연 발생하고 있다. 다문화 사회가 되면서 아직도 순혈주의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들이나, 박물관 유물이 된 이데올로기를 끄집어 내어 남북 대결 국면을 조장하는 등의 현실은 분명 한번쯤 되돌아봐야 할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이런 불합리한 현실을 타개할 힘의 원천이 바로 희망이다. 불의에 대한 분노도 희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결코 동력을 얻을 수 없다.

 

주인공 '나'를 찾아온 동근이는 낯선 청년이었지만 한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전혀 낯선 얼굴만은 아니었다. 반은 당숙을 닮고 반은 당숙모를 닮은 육촌 형제 동근이었다. 오랫만에 본 동근이는 주인공 '나'한테 이렇게 물을 것이었다. 동근의 이 질문은 힘겨운 시대를 묵묵히 견디며 살고 있는 우리 시대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작은 희망의 메세지가 될 것이다.

 

"형님, 비가 그치고 나면 하늘은 어떤 빛깔이 되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그 하늘에 뭐가 뜨는지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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