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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세계명작단편소설

병영 혁신안이 20년 후 반전이 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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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후/오 헨리(O. Henry, 본명 William Sydney Porter, 1862~1910, 미국)/1906년

 

'칵테일 사랑'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마음 울적 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이렇게 시작하는 노래다. 20년 전 노래지만 요즘도 가끔 흥얼거리곤 한다. 이런 노래라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나 가장 슬펐던 시절에 들었으리라. 병아리(이등병) 딱지를 떼고 군대 생활에 본격적으로 적응해 가던 1994년 봄. 하루 일과가 끝나면 부대 방송을 통해 흘러 나왔던 노래가 바로 '칵테일 사랑'이었다. 많은 남성들이 군대 생활을 돌이켜보면 훈련보다 괴로운 시간이 개인정비시간(자유시간)일 것이다. 이 시간에 얼차려나 구타가 흔히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근무했던 부대에는 구타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구타나 얼차려 때문에 괴로운 시간도 있었다. 아마 일병으로 진급하기 전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구타가 사라진 것이다. 그 때가 바로 내가 일병 계급장을 달 즈음이었다. '칵테일 사랑'은 그렇게 힘들었던 하루 일과를 제대로 보상받을 수 있는 시간으로의 초대였던 것이다. 

 

내가 고참이 되고 전역하는 순간까지 구타는 남의 부대 얘기였다. 이렇게 된 데는 순전히 병사들 자율적 실천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얼차려나 구타 금지 등 '병상호 5대 금지사항'이라는 게 있었지만 제대로 지켜진 부대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우리 부대에서는 고참들을 중심으로 구타나 얼차려 금지를 선언하고 각 내무반이나 분과에서도 자율적으로 이를 실천해 나갔다. 토익 준비하는 병사, 취업 준비하는 병사, 열심히 몸매를 만드는 병사, 피엑스에서 먹는 재미를 만끽하는 병사, 좋아하는 음악에 흠뻑 빠져있는 병사, 수다 떠는 재미에 취침시간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는 병사. 비록 제한적이긴 했지만 자유시간을 보내는 풍경도 다양했다. 말로만 듣던 요즘 군대의 모습을 나는 벌써 20년 전에 경험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화를 내심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간부들이었다. 고참들을 불러 에둘러 얼차려나 구타를 강요했다. 그저 수월한 통제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겠지만 병사들에게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그들의 각종 비리들을 은폐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내심도 깔려 있었으리라.

 

▲사진>구글 검색 

 

20년이 지난 2014년. '참으면 윤일병, 못참으면 임병장'이라는 말이 유행할만큼 연일 쏟아지는 군대 내 구타나 총기사고, 자살 뉴스에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경험으로 따지면 이런 후퇴도 없다. 일반적으로 군 생활을 했던 남자들에게도 20년이란 시간 속에 조금도 변하지 않는 병영 문화가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분명 20년은 사회 특히 군대가 젊은이들에게 선진병영문화에 대한 약속의 시간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이고 20년의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사고가 터질 때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국방부는 병영 혁신안이라는 것을 발표했지만 병사 휴대전화 소지 허용, 군사법 제도 개혁 등 알맹이는 빠진 미봉책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도 이 약속을 믿을 국민이나 젊은이가 얼마나 있을지. 수십 년 동안 양치기 군대였으니 말이다.

 

뉴욕의 어느 늦은 밤, 캄캄한 철물상 점포 앞에 한 남자가 벽에 기대어 잎담배를 물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찰 중이던 경찰이 무슨 일인지 묻자 그는 자신은 서부에서 왔고 이 곳에 살고 있을 친구 지미를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것도 20년 전에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했습니다. 20년이 지난 뒤에 이곳에서 이 시간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어떤 신분이 되어 있더라도,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 반드시 만나자고. 20년 후에는 피차 운이 열려서 성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길로 나아가든지 성공할 거라고 마음의 결심을 했던 겁니다." -<20년 후> 중에서-

  

드디어 지미가 나타났고 그들은 20년 만에 감격적인 해후를 했다. 하지만 길모퉁이를 지나 밝은 곳에 이르자 남자는 깜짝 놀랐다. 옆에 있던 친구는 자기가 어릴 적부터 알던 지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서부에서 온 이 남자의 이름은 보브였다. 지미로 알았던 낯선 남자는 보브에게 편지 한 장을 건넸다.

 

보브

나는 약속 장소에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네. 그런데 건너편에서 자네가 성냥을 켜서 잎담배에 불을 붙일 때 시카고에서 지명 수배가 되어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말았네. 하지만 차마 나는 자네를 체포할 수가 없었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며 한 바퀴 돌고 와서 다른 형사에게 부탁을 한 것이네. -<20년 후> 중에서-

 

오 헨리의 소설 <20년 후>는 그의 다른 소설이 그렇듯 기막힌 반전의 묘미가 있다. 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약속, 그러나 누구나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지킨 두 남자의 이야기다. 불행히도 두 남자는 경찰과 범죄자로 만나고 말았다. 소설은 이 기막힌 반전을 통해 무슨 메세지를 전하고 싶었을까? 신분을 초월한 우정? 공사를 구분할 줄 아는 공평무사의 정신?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개척할 것인가?...창작이 작가 상상력의 산물이라면 해석은 독자 상상력으로 다양해질 수 있다. <20년 후>의 반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독자의 몫이라는 말이다.

 

2014년 올해 태어난 남자 아이들이 자라 20년 후면 군대에 간다. 올해 태어난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될 때는 군대없는 세상이 되면 얼마나 좋으련만 이 아이들과 군대가 20년 후에 만나자는 약속은 운명이다. 게다가 군대는 또 약속을 했다. 소설 속 반전이 20년 후 우리 사회, 병영에서 재연된다면 2034년판 윤일병, 임병장은 불보듯 뻔하다. 이런 반전을 막기 위해서라도 국방부의 병영 혁신안은 위기 모면용 땜질식 처방이 아닌 달라진 신세대 문화와  병영 문화를 감안한 현실성과 진정성이 반드시 담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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