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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시인의 마을

일제와 군사정권의 참혹했던 아동인권탄압 현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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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 섬에도

동트는 새벽이 있었으련만

아주 오랜 날 유폐된 섬 속에

소년들이 있어야만 했으니

저물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이 정녕 역사일진대

삼가 오늘 무릎 꿇어

그대들 이름을 호명하나니

선감도 소년들이시여

어머니 기다리시는 집으로 밀물치 듯 어희 돌아들 가소서

이 비루한 역사를 용서하소서

 

-농부시인 홍일선의 시 '한 역사' 중에서- 

 


 

민족연구소 회보 《민족사랑》7월호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현장 한 곳이 소개되었다. 1942년 5월. 일제는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현 단원구 선감동으로 지금은 경기창작센터가 들어서 있음)에 선감학원이라는 직영 감화원을 설치했다. 감화원은 8~18세의 부랑 소년들이나 불량 행위 우려가 있는 고아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로 당시 이곳에서 생활하던 500여 명의 소년들은 '어린이근로정신봉사대'로 불리며 일제의 전쟁 군수물자 제작에 동원됐고 혹독한 체벌과 고문으로 고통을 겪었다. 이 와중에 숨진 다수의 소년들은 학원 근처의 야산에 매장됐다. 

 

▲선감학원 위령비. 사진>안산지역사연구모임 

 

선감학원의 아픈 역사는 일제 강점기로 끝나지 않았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인 1960~70년대 거리를 떠돌던 아이들이 선감학원으로 끌려가 범법자 취급을 받으며 바다를 메워 염전을 만드는 등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려다 조류에 휩쓸려 숨진 아이들이 부지기수였고, 일부는 상급생들의 성폭력에도 시달렸다고 한다.

 

1960년대에만 무려 400여 명이 선감학원에 수용됐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처럼 이들을 끌고 간 법적 근거는 없었다. 부랑아들이 사회불안을 일으킨다는 군사정권의 명분 아래 구두닦이나 신문팔이 등이 주요 타깃이 되었다. 명목상 선감학원은 국립 고아원이었지만 이들 중에는 부모나 보호자가 있는 아이들도 상당수 끌려갔다.

 

군사정권의 반인권적 행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선감학원이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비극적 사건의 현장이었음을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2000년 일본인 이하라 히로미쓰였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5월29일 경기창작센터 본관 옆 공터에 작은 위령비가 건립됐다. 비석에는 '농부시인'으로 유명한 홍일선 시인의 '한 역사'란 시가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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