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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세계명작단편소설

루신과 프로스트의 '길'을 통해 본 희망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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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루신(魯迅, 1881~1936, 중국)/1921년

 

고향의 이미지는 흡사 어머니를 떠올린다. 생명의 근원이면서 끝없는 회귀 본능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고향은 늘 그립고 애틋하다. 오죽했으면 수구초심(首丘初心)이나 호마망북(胡馬望北)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미물인 여우도 죽을 때면 제 살던 언덕으로 머리를 둔다고 하고, 호나라의 말도 호나라에서 북풍이 불어올 때마다 그리움에 북쪽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하물며 미물인 여우나 말도 이럴진대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평생을 외지에 떠돌다가도 나이가 들고 죽을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것이 인지상정이다. 타향에서 화려한 사후를 맞느니 고향 땅 어딘가에 한 줌의 흙이 되고픈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한편 누구든 태어난 곳이 따로 있지만 누구나 고향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랫동안 각인된 고향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뒤로는 뻐꾸기 울어대는 산이 있고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면 멀지 않은 곳에 송사리떼 노니는 실개천이 있는 곳. 고향은 늘 이런 곳이었고, 이런 곳이어야 했다. 각인된 고향의 이미지가 이렇다 보니 오랫만에 찾아간 고향이 화려하게 변신한 풍경에서는 그동안 품었던 애틋함이 사그러들기도 한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도 엄연히 고향이 있지만 섣불리 고향 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이유다. 어찌보면 고향은 시대보다 몇 발자국 아니 한참 뒤에서 소걸음으로 쫓아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20세기 중국 문학의 거장이자 <아Q정전>의 저자인 루신은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고향 풍경'에서 쓸쓸함과 허전함을 느껴야만 했다. 

 

아마도 고향이란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원래 모습 그대로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달라 보이는 것. 단지 나의 심정이 허전하고 쓸쓸하기 때문에 고향도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일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번에 고향과 작별하기 위해 왔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우리 가족이 함께 살던 정든 집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다. 식구들이 집을 비우고 이사를 가야만 했다. -<고향> 중에서- 

 

▲사진>구글 검색 

 

루신이 말한 고향과의 작별은 물리적 작별임과 동시에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봉건적 고향과의 단절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떠나 있다 돌아온 고향이 어릴 적 정답던 그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죽마고우였던 룬투의 비참한 모습에서 루신은 무지와 가난 속에서 쇠락해가는 고향을 보았을 뿐이다.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얼굴에는 기쁨과 처량함이 섞인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긴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더욱 공손한 태도를 취하더니 이렇게 불렀다.

"나으리!"

나는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우리 둘 사이에는 이미 두꺼운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 슬퍼해야 할 장벽 말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향> 중에서-

 

루신은 아마도 봉건체제와 구시대적 유교의 가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고향을 통해서 쇠락해 가는 종이 호랑이 중국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루신은 새 질서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고향을 보면서 그저 좌절할 수 만은 없었다. 오히려 '희망'이라는 이름의 새 시대에 대한 무한한 갈증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그 유명한 '길'에 관한 명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사진>구글 검색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고향> 중에서-

 

책 좀 읽었다고 자부하는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 미국)의 시 한 편이 떠오를 것이다.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꺽여 내려간 데까지/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그 길을 걸으므로 해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중략…/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마음을 내려놓고 이야기할 것입니다/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중에서-

 

희망이 없다고들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해봐야 늘 제자리다. 팍팍한 삶이 개선되기는커녕 당장 오늘만이라도 벼텨내야 하는 현실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소식이라곤 생을 포기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절규뿐이다. 그들의 절박함을 담아내야 할 사회는 또 국가는 들릴 듯 말 듯 사그라드는 메아리쯤으로 치부한다. 부질없는(?) 동병상련만이 그들의 가는 길에 조그만 위로가 되어줄 뿐이다. 내일을 말하고 희망을 얘기하는 것은 이미 사치가 되어 버렸다. 더 이상 희망은 길을 걷다 수도 없이 채이는 돌부리가 아니다. 끊임없이 갈구하고 투쟁해야만 손에 잡히는 것이 희망의 본질이다. 늘 그래 왔지만 여태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루신이 말한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은 프로스트의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과 일맥상통한다. 즉 희망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또 희망은 끊임없는 투쟁과 연대의 산물이다. 길처럼 희망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없다. 가시밭과 덤불로 뒤덮인 땅을 오래도록 걷고, 누군가와 같이 걸어야 비로소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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