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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시인의 마을

탐욕스런 인간이 서 있는 이곳, '슬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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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영의 시 '슬픈치, 슬픈'

 

통영 비진도에 설풍치(雪風峙)라는 해안언덕이 있다. 폭설과 비바람이 심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절벽이다. 그래서 설풍치는 슬픈치로 불리기도 한다. 그 해안을 누가 다녀갔다. 길게 흘러내린 절벽치마의 올이 풀려 도도새, 여행 비둘기, 거대한 후투티, 웃는 올빼미, 큰바다쇠오리, 쿠바 붉은 잉꼬, 빨간 뜸부기. 깃털이 날아가 찢어진 치마에 달라붙는다. 다시 밤은 애틋해진다. 게스트하우스의 창문을 열오놓은 채로, 달의 문을 열어놓은 채로 잠을 잔다. 희 눈이 쏟아진다. 커튼의 올이 풀려 코끼리새 화석의 뼈를 감싼다. 따뜻한가요? 눈사람이 끼고 있는 장갑의 올이 풀려 내 몸을 친친 감는다. 나는 달아나는 사람의 자세로 묶여 있다. 실종된 지 일주일이 지나 발견된 죽은 새를 안고 있다. 자세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누가 다녀갔지만 슬픈치는 여전히 슬픈치로 불린다. 해안 모퉁이에 새들이 계속 쌓인다. 사랑한 만큼 쌓인다. 침묵한 만큼 쌓인다. 게스트하우스의 창문을 열어놓은 채로, 나는 여전히 당신의 절벽에 매달려 있다. -출처 《창작과 비평》164호-

 


 

도도새, 여행 비둘기, 거대한 후투티, 웃는 올빼미, 큰바다쇠오리, 쿠바 붉은 잉꼬, 빨간 뜸부기, 코끼리새. 이 새들의 공통점은 언젠가 지구상 어딘가에서 평화를 구가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최소한 인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큰바다쇠오리(왼쪽)와 코끼리새(오른쪽). 사진>구글 검색 

 

이들은 또 인간에게 아무 거리낌없이 다가왔다. 그들 눈에는 낯선 생명체였지만 '함께' 하리라 믿었다. 너무도 순진하고 순수했기에. 신이 지구라는 별에 팽개친 유일한 악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닌' 시간 동안 그들은 지구별을 떠났다.

이런 인간이 지금 서 있는 이곳은 폭설과 비바람도 쉽게 다가갈 수 없다는 절벽 '설풍치'다. '설풍치' 아래에는 인간의 탐욕이 삼켜버린 죽은 새들의 사체가 계속 쌓이고 있다. '설풍치'는 '슬픈치'다. 슬픈 '설풍치'에 인간이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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