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맵짠 러시아 텃세 vs 맵짠 연아

반응형

<문학 속 우리말> 맵짜다

 

한국인 밥상에서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 김치다. 있으면 손이 가지 않은 때도 있지만 막상 없으면 가장 생각나는 반찬이 김치다. 김치 없는 밥상이란 제 아무리 산해진미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라도 허전하기 그지 없다. 또한 한국인의 김치를 대표하는 맛이 맵고 짜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은 코끝으로 전해져 오는 매운 냄새에 맛을 보기도 전에 고개부터 흔들고 본다. 각 국을 대표하는 음식 중에 비단 김치만 매운 것이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얼마나 건강하게 사느냐로 관심사가 옮겨지면서 김치도 일대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 듯 하다. 맵고 짠 음식이 건강에 해롭다는 각종 연구 보고서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치라고 다 매운 것만은 아닌데, 가령 물김치나 동치미처럼 전혀 맵지 않은 김치도 있거늘 지나친 과민반응은 아닐까 생각될 때도 있다. 이런 변화는 한식 세계화라는 정부 정책과 더불어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모양새다. 아쉬운 것은 김치 저마다의 맛이 다 싱겁게 통일되어 이름만 김치로 남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그래도 김치는 어느 정도 맵고 짜야 제 맛이 아닐까.

 

구수한 흙냄새와 맑은 동해바람이 풍기던 옛 마을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맵짠 쇠냄새 나는 공장과 벽돌집들이 거만스럽게 배를 붙이고 사람을 깔보고 있는 것이다. –한설야의 『과도기』 중에서 

 

 

맵짜다는 김치의 맛처럼 맵다짜다의 합성어다. 하지만 꼭 맛을 표현할 때만 쓰는 말은 아니다. ‘맵다짜다가 주는 성질로 인해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말이 바로 맵짜다이다.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를 그린 안수길의 농촌소설 <목축기>에는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달도 없는 맵짠 날 밤중의 일이었다. 요란한 돼지의 비명이 돈사에서 들렸다고 생각되자 모두들 뛰어나갔으나 그때 벌써 비명은 와우산 기슭에서 사라진 뒤였다. 십여 명의 목장 사람들이 함께 뒤통수를 긁었을 밖에. 그날 밤은 별수 없었으나 찬호와 로우숭은 혈육을 찢기는 것 같은 아픔을, 그리고 분함을 억제할 수 없었다. –안수길의 <목축기> 중에서-

 

여기서 맵짜다는 바람이나 추위가 매섭고 사납다라는 뜻이다. 아래 신문 칼럼에 등장하는 맵짜다 <목축기>에서와 같이 날씨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하늬는 맵짜다. 한겨울에도 해안지대엔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거의 없으나 체감 온도는 영하권이다. 바람 때문이다. 옛 어른들이 오죽하면 정이월 바람살이 암소 뿔을 녹인다 했을까. 계절이 바뀌고 봄이 무르익을 즈음이면 마파람이 갈바람으로 바뀌어 심술궂게 몰아친다. 그 뿐인가. 태풍의 길목이라 여름철엔 폭풍우가 몇 차례 찾아와 섬을 휘저어놓고 지나간다. – 제민일보/아침을 열며 바람의 섬중에서

 

음식이 맵고 짤 때 또 바람 따위가 매섭고 사나울 때 뿐만 아니라 살림하는 솜씨가 알뜰할 때도 맵짜다라는 표현을 쓴다. 아래 소설에서 맵짠 아낙은 살림 솜씨가 똑부러지는 엄마를 의미한다.

 

엄마 정말 강경 가서 살려구?
에그 술장사라면 이제 지긋지긋허다. 저 누구냐, 이신통이 말이 그럴듯하더라. 임 비장하구두 논의를 해볼 참이여. 너 보내놓고 장쇠 데리구 강경 바람 좀 쐬구 올란다.
나는 엄마가 남에게 좀처럼 속거나 엎어치기를 당하지는 않을
맵짠 아낙임을 알고 있어서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신통 그 사람을 시집가기 전에 꼭 한 번만 더 만나보고 싶었다. 엄마는 털배자에 누비덧저고리까지 걸치고 나왔는데도 춥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한국일보/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 소리중에서-

 

손끝이 맵짜다라고 할 때도 살림 솜씨가 여간 아닐 때 쓰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맵짜다가 사람의 성질이나 성격을 표현할 때도 쓰인다. 뜬금없이 얼마 전 폐막한 동계 올림픽 이야기 좀 하려고 한다. 역대 그 어떤 올림픽보다 아쉬운 여운이 길게 남아서다. 꼭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바로 피겨 퀸김연아 선수 때문이다. 아직도 세계 각국 언론은 소치 동계 올림픽 여자 피겨 종목의 결과에 대해 수긍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그도 그럴 것이 차원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김연아 선수가 완벽한 연기를 펼치고도 은메달에 머물렀으니 개최국 러시아의 도를 넘은 홈 어드밴티지가 이번 올림픽 오점 중의 하나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피겨 퀸피겨의 전설로 남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쇼트 프로그램이 끝나고 어느 정도 현지 분위기를 감지했을 법도 한데 다음 날 전혀 긴장하지 않고 프리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모습이나 어이없는 최종 점수가 발표되었을 때도 웃음을 잃지 않는 김연아 선수의 얼굴에서 오히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는 필자가 더 부끄러워졌으니 말이다. 역시 야무지고 옹골차다. ‘ADIOS YUNA!’

 

맵짜다가 사람의 성질을 나타낼 때는 야무지고 옹골차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김연아 선수처럼 말이다. 이번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는 러시아의 맵짠 추위와 홈 어드밴티지도 결코 맵짠 연아를 꺾을 수 없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