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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라면이 사라진 미래, 이런 일이 생길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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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의 황제/김희선/창작과 비평 2013년 가을호

 

모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 야간매점이라는 코너가 있다. 냉장고 안에 남아있는 음식들을 이용해 저렴하면서도 몸에 부담스럽지 않은 야식을 직접 만들어보자는 취지인 모양이다. 매주 서너 명의 연예인들이 직접 만들어온 요리를 소개할 때마다 기발한 아이디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야식으로 먹기에는 다소 황당한 요리들도 등장하곤 한다. 한편 야간매점코너에 잊을 만 하면 등장하는 단골메뉴가 있다. 바로 라면이다. 라면을 맛있게 먹기 위한 번뜩이는 요리 방법들이 등장하는데 그야말로 국민간식 라면의 위용 그 자체다. 어떻게 하면 라면을 맛있게 끓일까 하는 것은 비단 연예인들만의 고민이 아닐 것이다. ‘파 송송, 계란 탁은 기본이고 누구나 자신만의 라면 맛있게 끓이기의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거 아는가? 가장 맛있는 라면은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라면 봉지 뒷면에 소개된 조리법(?)이라는 사실. 

 

한때 라면이라는 음식이 있었다.’

한때 라면이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5천만이 좋아하고 세계인들의 입맛까지 사로잡고 있는 라면이 없어지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말이다. 김희선의 소설 <라면의 황제>는 첫 문장부터 이렇게 호기심을 잔뜩 불러일으키면서 시작한다. <라면의 황제>는 라면이 사라진 미래를 가정한 소설이다. 라면 하나로 이리도 흥미진진한 소설을 쓰다니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라면이라는 음식이 있었다. 그것은 기름에 튀겨 건조시킨 국수를 스프와 함께 끓이거나 혹은 그냥 뜨거운 물만 부어 먹을 수도 있도록 만든 일종의 즉석식품이었다. 물론 듣기론 지금도 극빈국 어디에선가는 이 괴상한 인스턴트식품이 필수 식량의 하나로 유통되고 있다고 하지만, 세계보건기구는 그런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지 않고 있다. -<라면의 황제> 중에서-

 

라면은 왜 사라져야만 했을까

 

저자는 라면이라는 식품이 처음 등장하고 사라질 때까지의 역사를 사실에 근거해 담담히 서술한다. 2007 19, 라면을 처음 만든 대만계 일본인 안도 모모후쿠의 죽음을 추모하며 『뉴욕타임즈』가 뜨거운 물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라면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한 음식이라고 치켜세운 사실이라든가,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당시 난민에게 제공된 음식도 라면이었다는 것이다. 2005년은 라면이 지상의 간편식품이라는 한계를 깨고 우주비행사의 필수식량 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림으로써 우주로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라면의 유래에 대해서는 일본 유래설 말고도 중국 건면 유래설이 있는데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들이 중국인들의 전시비상식량인 건면의 맛을 잊지 못해 건면을 정제우지로 튀겨 보관하기 쉽도록 포장하고 수프를 넣어 인스턴트화 했다는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1963년 삼양식품에서 처음으로 닭육수를 이용한 라면을 출시했다고 한다. 안도 모모후쿠가 1958년에 처음으로 개발했으니 5년 만의 일이다. 한때 우지 파동(나중에 무혐의로 최종판결)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국내 라면 업체의 매출은 연간 2조원을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세계적으로도 연간 천억 개 이상이 소비되고 있다고 한다. 비록 가정이긴 하지만 이런 라면이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소설은 라면이 사라진 이유로 20세기 후반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라면 유해론이라는 가정을 설정한다. 기름에 튀겨 건조시킨 면과 각종 첨가물이 들어간 수프가 수만 가지 질병을 비롯해 우울증이나 폭력 같은 심각한 정신진환까지 유발한다는 연구결과 때문이란다. 신기하게도 그런 문건들의 결론은 하나같이 똑같았는데 라면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급기야 현대사회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제의 주범으로 라면이 지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시 경제전문가들은 일인당 라면 소비량이 많은 지역일수록 거주자의 월평균소득이 감소한다는 보고서를 내세워 빈곤의 기저에 라면이 있음을 지적했고, 교육 관계자들은 어린 시절 라면 소비량과 명문대 진학률은 반비례한다는 컨설팅 업체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학교 주변 300미터 이내의 라면가게를 모두 추방하자는 법안을 발의했다. -<라면의 황제> 중에서-

 

가짜 영웅 만들기의 현실을 비판하다

 

소설은 본격적으로 라면이 사라진 미래에 라면을 추억하는 라면동호회 회원들의 영웅 만들기과정을

상세히 서술한다. 그 중심에는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이라는 제목의 책을 낸 김기수씨가 있다. 라면이 한창 전성기를 누릴 때 라면가게 사장이었던 김기수씨가 라면의 황제로 등극하는 과정은 요즘 우리 사회 일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억지 영웅 만들기의 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라면동호회 회원들은 스스로를 박해받는 소수라고 저처하며 회원들의 유대감과 세상에 대한 투쟁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구심점이 되어줄 전설적이고도 영웅적인 인물이 필요했다. W시 외곽 공원묘지에 잠자고 있던 김기수씨를 세상으로 불러낸 건 당연히 라면동호회였다. 사실 김기수씨는 생전에 영국에 본사가 있는 기네스북 한국지부에서 개최한 라면만 먹으며 오래 버티기분야 월드레코드에서 H군 박모 노인에게 신기록 타이틀을 뺏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면동호회 회원들은 박모 노인보다는 김기수씨를 그들의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잘못된 믿음을 사실인 양 호도해 간다.

 

우리 역시 처음엔 많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김기수씨로 하느냐, 박모 노인으로 하느냐를 두고 말이에요. 개중엔 그런 영웅적이고 전설적인 인물이 왜 굳이 필요하냐며 아예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죽은 김기수씨에겐 박모 노인에겐 없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라면이 곧 운명인 자 특유의 그 느낌…… 그걸 뭐라고 해야 할진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우리에겐 바로 그런 이미지가 필요했던 겁니다. 아시겠어요?” -<라면의 황제> 중에서-

 

요즘 말로 하면 스토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영웅 만들기과정은 그야말로 억지춘향 격이 되고 만다. 동호회 회원들은 엄연히 존재하는 팩트마저도 부정하면서 영웅 만들기에 혈안이 된다. 가령 김기수씨가 라면이 처음 개발된 날인 1957 825일에 태어났으니 운명이라는 둥(사실 라면이 처음 개발된 해는 1958 825일이다), 과거 방송에 출연해서 했던 라면 예찬론이 박모 노인이 27년간 라면만 먹었다며 모아온 영수증보다 더 스토리텔링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동호회 회원들은 실제 사진이 영 못마땅한지 동호회 멤버 중 한 명의 얼굴을 김기수씨 캐리커쳐라며 앞으로 라면동호회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것이라고 홍보한다. 확신에 찬 표정이나 발언과는 달리 방송에 비친 김기수씨의 얼굴을 옆에서 보면 찡그리고 있다는 표현에서 일련의 과정들이 조작된 영웅 만들기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저자가 <라면의 황제>를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가짜 영웅 만들기만이 아니다. 단순히 이슬람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국산 압력밥솥과 라면 스무 봉지가 꽉꽉 채워진 가방을 들고 인천공항에 입국한 청년에게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을 찍기도 한다. 사제폭탄을 만들 의도로 압력밥솥과 라면을 소지했다는 것이다. 또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종편(종합편성채널)의 의학 프로그램들을 비꼬기라도 하듯 소설에서는 라면 유해론의 확산지로 종편 프로그램을 등장시킨다. 요즘 종편을 보면 과학적으로 증명도 되지 않은 민간요법들을 마치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방송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방송 나간 후 방송에 소개된 식물이나 약초는 씨가 마를 정도라니 방송이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진실인양 호도해 그릇된 믿음이 확산되는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영웅 만들기는 찡그린 부분은 살짝 감추고 라면의 황제로 등극시킨김기수씨처럼 사실 관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특정 집단의 정치적 목적은 친일을 했어도, 친일청산을 방해했어도 상관없다. 영웅을 넘어 신적 반열에까지 올려놓으려 한다. 오로지 영웅이 있어야만 그들의 정치적 목적이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짜 영웅의 속살은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도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어쨌든 소설에서처럼 유해론이 끊이지 않는 라면이지만 라면은 온 국민이 즐기는 국민간식임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빈곤층에게는 라면이 밥을 대신하기도 한다. 아무리 몸에 좋은 음식도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이다. 먹어서 나쁜 게 담배 빼고 무엇이 있으랴. 적당히 적절히 골고루 먹는 게 건강을 지키는 지름길이 아닐까 싶다. 라면이 사라진 미래,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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