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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목적이 상실된 현대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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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정열/기준영/2013

 

세족식(洗足式, 카톨릭 교회 의식의 하나)이 열리고 있는 성당, 남자의 시선이 한 여성의 다리를 향하고 있다. 이 남자의 이름은 프란시스코이고 그가 그렇게 집중하고 있던 다리의 주인은 글로리아다. 그 날 이후 프란시스코는 병적일 만큼 글로리아에게 집착한다. 글로리아는 프란시스코의 친구와 결혼할 사이다. 프란시스코는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글로리아에게 끊임없는 구혼을 하고 끝내 결혼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못한다. 프란시스코의 의처증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짧은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프란시스코는 사제의 길을, 글로리아는 라울과 결혼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과 함께 프란시스코가 있는 성당을 방문한다. 헤어진 아내를 몰래 훔쳐본 프란시스코는 어두운 굴 속을 향해 걸어간다.

 

루이스 부뉴엘 감독(Luis Bunuel, 멕시코)의 영화 <이상한 정열(the Strange Passion, 1952)>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인물인 프란시스코가 페티시즘(Fetishism, 성욕의 하나로 이성의 몸의 일부 또는 옷가지나 소지품 따위에서 성적 만족을 얻는 병리현상)과 의처증, 강박증에 시달리며 파멸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제가 되는 것으로 프란시스코의 병적인 집착과 강박증이 끝나는 것 같지만 영화의 결말은 그가 완전히 이 불행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암시해 준다. 영화에서 보여준 주인공의 페티시즘과 의처증, 강박증의 원인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기준영의 소설 <이상한 정열>이 부뉴엘 감독의 동명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삶의 목적을 쫓아가는 열정이 영화에서는 페티시즘과 의처증으로, 소설에서는 불륜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제목 그대로 삶에 대한 비정상적인 정열인 셈이다. 유추해 보건대 영화에서 이상한 정열은 종교의 금욕적인 삶으로부터 주인공이 느끼는 내적 억압을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탈출구처럼 보인다. 이는 현대사회의 보이지 않는 억압 구조에 대한 감독의 저항 의식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기준영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보인 이상한 정열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요즘 TV 드라마에서 불륜과 출생의 비밀이 빠지면 그야말로 팥소(앙꼬) 없는 찐빵일 것이다. ‘막장이라는 말로 비난을 쏟아내지만 실은 비난이 거셀수록 드라마의 인기는 상종가를 친다. 단순히 말초적인 자극성 때문일까. 어쩌면 지극히 비현실적인 설정 속에서 현실의 무료함과 단순함을 잊기 위한 방편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불륜이라는 소재는 전개 과정이 비현실적일지 몰라도 불륜그 자체는 숨길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도 막장에 열광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요컨대 기준영의 소설 <이상한 정열>과 요즘 유행하는 막장 드라마에서의 불륜은 무한경쟁에 내몰린, 낙오자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 갖지 못한 현대인들이 목적을 상실한 데서 오는 삶에 대한 왜곡된 열정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인공 무헌의 삶이 그렇다. 직장에서는 상사와의 불화로 탈모가 진행됐고, 얌전했던 딸도 사춘기에 접어들자 사고뭉치로 변했고, 경제적인 압박은 결국 실패한 결혼 생활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결혼 전 사귀던 말희와의 서툰 연애도 무헌으로 대표되는 현대인의 목적 의식이 상실된 권태와 체념의 발로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일관되게 서툴렀다. 그와 키스하던 때마다 말희는 그와 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자자고 하지 않았다. “지켜줄께했다. 그와 함께 있을 때 그녀는 때로 불타올랐다가 얼음창고에 갇히곤 하는 벌받은 인형 같았다. -<이상한 정열> 중에서-

 

부뉴엘 감독의 영화 속 페티시즘일까. 무헌은 어느 날 우연히 옛 애인 말희의 상처 난 다리를 보게 되고 그녀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알 수 없는 집착을 하게 된다. 그에게 일상은 익숙해지는 시간이자 숨 쉬어야 하는 시간에 불과하다. 목적이라곤 상실된 이런 일상에 비해 무헌에게 불륜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놀라는 척하지만 실은 그다지 놀라지는 않고 남들의 생은 어떠한지 쳐다보게 되는 그런 민낯의 이야기들이다. 흔하게 재연되는 주변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 시대 가장의 아니 현대인의 상실된 목적 의식을 일깨우는 열정이나 정열이 불륜이라는 왜곡된 현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집을 나서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엊저녁 딸의 서러움과 울분으로 집의 벽이 휜 것 같았다. 밖에서 보니까 집은 조금 부풀어오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집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이 딸 정도 나이의 소년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영원히 돌아갈 데가 없는 사람의 슬픔을 생각하면서 점점 자유로워졌다. 그는 어린 날 보았던 만화영화의 주인공처럼 개와 함께 뛰었다. -<이상한 정열> 중에서-

 

불륜이 결코 미화되어서는 안 된다. 소설 제목처럼 이상한 정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무헌의 옛 애인에 대한 집착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개인의 삶이 다수의 행복을 가장한 소수의 권력과 자본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 아프리카 초원의 초식동물처럼 말이다.

 

생이 덧없다는 말이 무용했다는 주인공 무헌의 이상한 정열앞에서 현대인이 극복해야 할 삶의 허무함과 공허함은 오히려 빛의 흔적도 없는 막장 속으로 빠져드는 듯 싶다.

 

그는 턱없이 더 집요해질 때도 있었다. 보라색 꾸러미를 들고 그와 한 택시에 올라탔던 소년, 가전제품과 개에 정통한 사내, 다리에 흉이 진 채로 나타난 옛사랑이 살고 있는 저편, 아니 그가 부재한 자리에서 무언가를 통과해왔고 이제 여기 당도해서 서걱거리고 부딪치고 신음하고 비틀렸다가, 다시 환한 웃음이 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밝아오는 아침 해를 맞는 것들에. -<이상한 정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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