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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인간은 왜 평생 반쪽을 찾아 헤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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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사랑에 관하여/플라톤/박희영 옮김/문학과 지성사

 

우선 자네들이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고, 그 본성이 겪었던 것들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라네. 사실 아주 먼 옛날에 우리의 본성은 오늘날 인간의 본성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네.

 

첫째로 인간은 오늘날처럼 남성과 여성의 양성이 아니라 세 종류로 나뉘어 있었음을 알아야 하네. 그런데 이 세 번째 종류의 인간은 남성과 여성 모두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을 지칭하는 이름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지만 그 실재 자체는 사라졌다네. 사실 자웅동성은 그 옛날에는 하나의 독립된 종이었으며 형태상으로나 이름상으로 모두 남성과 여성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네. 어쨌든 그 종은 오늘날에는 사라져서 존재하지 않고, 단지 그 명칭만 특정의 사람을 비난할 때 쓰이고 있다네.

 

두 번째로 알아야 할 것은 이 종이 한 몸으로 이루어져 있어, 둥그런 등과 원형의 옆구리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라네. 그들은 네 개의 손과 네 개의 다리를 지니고 있고 완벽하게 둥그런 목 바라 위에 완전히 서로 똑 같은 두 개의 얼굴이 반대로 놓여 있고 그 위에 하나의 머리가 붙어 있다네. 그들의 귀는 네 개이고 수치스러운 부분도 두 개인데, 그 나머지 것들은 모두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로부터 상상할 수 있을 것이네.

 

걸음걸이를 보자면, 그들은 지금처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이면 어디로든지 똑바로 갈 수도 있고, 빨리 달려가고 싶을 때에는 마치 지상 회전을 하는 사람들처럼 다리를 원모양으로 회전하며 앞으로 곧장 갈 수도 있다네. 이때 그들은 여덟 개의 사지를 지지점으로 이용하여 수레바퀴 모양이 되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쓴다네.
-<
향연-사랑에 관하여> 중에서-

 


 

 사람들은 흔히 사랑을 에로스와 플라토닉 러브로 구분한다. 사랑이면 사랑이지 왜 굳이 사랑을 둘로 쪼개려고 하는 것일까. 어쩌면 고매한 인간들의 자기 과시의 일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굳이 구분해야 한다면, ‘에로스는 육체적 사랑이고 플라토닉 러브정신적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리스 신화에서 에로스는 태초에 카오스의 아들이었지만 이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변형되었다. 에로스는 정열의 신이자 풍요의 신으로 그의 절친은 포토스(동경)와 히메로스(욕망)로 알려졌다. 에로스가 육체적 사랑의 대명사가 된 것도 대충 에로스에 관한 이런 신화적 내용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토닉 러브는 어떻게 정신적 사랑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바로 플라톤이 남긴 많은 저서 중 하나인 <향연-사랑에 관하여>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향연-사랑에 관하여>를 읽어본 독자라면 플라톤이 정신적 사랑만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금새 알 것이다. 플라톤은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의 조화를 강조했지만 후대 호사가들에 의해서 플라토닉 러브=정신적 사랑이라는 도식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위에 소개한 내용은 <향연-사랑에 관하여> 중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로 이성애와 동성애의 신화적 어원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태초에 남성과 여성 말고도 양성을 한 몸에 지닌 자웅동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세 종류의 인간이 있었다는 이 이야기로부터 어떻게 이성애와 동성애의 어원까지 발전할 수 있었을까. 아리스토파네스의 다음 이야기 때문이다. 인간이 죽을 때까지 자기의 반쪽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는 운명, 그것은 바로 신을 노하게 만든 인간의 원죄라고 할 수 있겠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신으로부터 힘과 지적 능력을 부여받은 인간은 결국 그 힘과 능력으로 오만함까지 가지게 되었다. 즉 인간이 신들의 나라인 하늘을 침범하려 했던 것이다. 하늘 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인 대지까지 관장하고 있었던 제우스가 인간의 오만방자함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을 터. 제우스는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을 내리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은 세계 어느 신화에서도 인간의 오만함을 벌하기 위해 신이 인류를 멸망시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대지에 사는 어떤 동물도 신에게 제사와 공물을 바칠 만큼의 지적 능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신이 인간 세상을 관장하지만 그 신을 만든 이가 또 인간이라는 사실은 신과 인간이 영원히 공생할 수밖에 없는 숙명은 아닐런지. 그래서 신이 인간을 벌할 때는 늘 지푸라기 하나쯤은 남겨두는 법이다.

 

어쨌거나 제우스의 오만방자한 인간에 대한 벌은 인간을 둘로 나눠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게 만들었고 혐오스럽게 잘려나간 반쪽을 보면서 오만함 대신 겸손함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신화적으로 이성애와 동성애가 어떻게 설명되는지 대충은 짐작했을 것이다. 자웅동성(androgynon, 남성andron과 여성gynon의 합성어)이었던 인간들은 그 반쪽인 이성을 찾아 합체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문제는 세 종류의 인간 중 자웅동성을 제외한 남성과 여성이었다. 둘로 잘렸지만 나머지 반쪽도 동성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배꼽 주위에 주름이 있는 이유는 제우스가 인간을 둘로 나누고 아폴론이 잘린 부분들을 치료했는데 인간들이 예전의 자기 상태를 기억할 수 있도록 약간의 주름을 남겨놓았다고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읽어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이 밖에도 <향연-사랑에 관하여>에는 당대를 주름 잡았던 그리스 인사들이 총출동해 사랑에 관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나간다. 플라톤 하면 독자들은 먼저 머리가 지끈거릴텐데 이 정도 이야기라면 재미있고 읽을만하지 않을까. 플라톤의 많은 저서 중에서도 가장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바로 <향연-사랑에 관하여>일 것이다. 굳이 철학이 아니더라도 사랑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 꺼리를 발견하는 재미 또한 쏠쏠할 것이다.

 

*향연의 영어식 표현 symposium함께sym과 먹고 마신다posium의 합성어로 심포지엄의 어원이 된 말이지만, 오늘날 심포지엄 현장의 무거움과 <향연-사랑에 관하여> 속 그리스 명사들의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다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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