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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서른,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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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새해/김연수/2013년

 

처음 만난 사람끼리 서로의 나이 물어보기를 꺼리는 서양인들은 십 년마다 돌아오는 아홉 번 째 생일의 의미가 남다르다고 한다. 지난 십 년의 끝이면서 새로운 십 년의 시작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라는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특히 열아홉 번 째 생일은 본격적인 성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시기로 그 의미가 남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문화의 국경이 사라진 요즘 우리라고 시간이나 세월이 주는 의미가 다를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 서른이 가지는 의미는 서양에서의 열아홉 번 째 생일만큼이나 특별한 시간이나 세월이지 싶다.

 

김연수의 소설 <벚꽃 새해>에서 요즘말로 주인공 성진의 '구여친'인 정연이 '내가 먼저 서른살이 됐다면, 내 쪽에서 먼저 보기 좋게 오빠를 차버렸을 수도 있었으니까.'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우리 사회 청춘들이 느끼는 서른의 의미가 스물이나 마흔 또는 그 이상의 나이를 맞닥뜨렸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많은 작가들이 서른을 얘기하고, 꼭 서른이 아니더라도 작가들의 서른 타령에 열광하는 이유를 소설 <벚꽃 새해>를 통해 되짚어보고자 한다. 서른,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누구나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채색된 인생의 변곡점을 꿈꾼다. 인간수명 백 세 시대가 결코 공상과학영화 속의 미래가 아닌 요즘 마흔이든, 예순이든 저마다가 꿈꾸는 인생의 변곡점은 예전에 비해 여유가 있고 느슨해진 것도 사실이다. 과거 예순이 은퇴하고 여생을 즐기는 나이였다면 지금은 여전히 일에 대한 정열과 열정이 남아있는 시기이니까. 어쩌면 젊은 시절 정열과 열정을 저축해두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그게 기쁨인지 슬픔인지 판단은 서지 않지만. 어쨌든 저마다 꿈꾸는 인생의 변곡점으로 가는 여정에 어김없이 거쳐야만 하는 '서른'이라는 시간은 신이 세상을 창조하기 직전의 상태, 카오스가 아닐까.

 

"그게 그렇더라구. 어릴 때만 해도 인생이란 나만의 것만 남을 때까지 시간을 체로 거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른이 되고 보니까 그게 아닌 것 같더라. 왜냐하면 서른이 되고 보니 남는 게 하나도 없었거든. 다 남의 것이야. 내 건 하나도 없어." -<벚꽃 새해> 중에서-

 

왜 가장 뜨거워야 할 나이에 중력에 중력을 더한 무게감을 견뎌야만 할까? 젊은 시절 꼭 거쳐야만 하는 필수코스가 된 대학 생활에 군대라는 시대적 불운까지 겹치면서 성인으로서 구가해야 할 이십 대의 삶은 부모의 관심과 보호가 필요한 십대의 연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진정으로 사회인이 되어야 할 삽십 대의 시작인 서른이 녹녹하냐면 또 그렇지 못한 것이 엄중한 현실이다. 여기에 결혼이라는 현실적인 장벽이 버티고 있다면……오로지 취업을 위해 대학 시절의 낭만은 치열한 전장의 상흔들로 가득하고 그 상흔들이 무색하게도 인생의 새로운 시작인 서른에 가진 내 것이라곤 지칠대로 지친 상처뿐인 몸뚱아리가 전부다.

 

서른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인생 선배와 작가들의 찬사와 조언도 사실은 서른 청춘들을 지켜주지 못한 우리 사회의 처절한 자기반성의 발로인지도 모를 일이다. 꽃이 아름다울수록 정작 꽃이어야 할 서른은 외롭고 한없이 작아진다.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 성진은 벚꽃이 피기 시작한 '벚꽃 새해',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서 있는데도 외롭지가 않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하다.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일까. 서른이 느끼는 그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 해답이라도 찾은 것일까.

 

 

옛 애인을 다시 만나서는 그녀가 그토록 예뻤을 줄이야 미처 몰랐다며 속으로 후회를 삼키는 일은 영화에나 나오는 판타지일 뿐이라는 게 평소 성진의 지론이었다. 그간 사랑했던 여자들을 여전히 그는 사랑하고, 또 그런 식으로 영원히 사랑할 테지만 그건 '다시' 사랑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뜻이었다. 한번 우려낸 국화차에다 다시 뜨거운 물을 붓는 짓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무리 기다려봐야 처음의 차맛은 우러나지 않는다. 뜨거운 물은 새로 꺼낸 차에다만. 그게 인생의 모든 차를 맛있게 음미하는 방법이다. -<벚꽃 새해> 중에서-

 

소설은 서른 때 먼저 이별을 고한 성진이 경주 남산의 목이 잘린 불상들을 보면서 상념에 잠겨있을 때 '구여친' 정연의 느닷없는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전에 선물한 태그호이어 시계를 돌려달라는 거이다. 성진은 이런 짓을 '진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소설은 옛 연인이 만나 시계의 행방을 찾아 역추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결국 시계를 찾지 못해서 둘이 결론 내린 '헛된 시간'은 다름아닌 이 시대 청춘들이 느끼는 서른의 시간일 것이다. 성진은 서른에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 여자친구 정연을 찼고, 정연은 또 성진과 같은 서른이 되어서 성진과 같은 마음으로 과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진상' 짓을 한 것이니 도대체 서른이 뭐길래....

 

태그호이어를 찾아 마지막으로 방문한 정시당 노인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면서 '헛된 시간' 서른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초라한 가게와 어울리지 않게 <신장의 역사>, <동방견문록>, <돈황학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두꺼운 양장본이 꽂혀있는 정시당 노인의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십수년 전에 중국 시안에 관광을 다녀온 사람한테서 병마용(兵馬俑)을 하나 받았는데 여기저기 진흙이 묻어있어 아내가 여러번 물로 헹구고 식초에 담그기까지 해서 진흙을 다 벗기고 윤을 냈는데 며칠이 지나 그 사람이 가게에 놀러와 그 인형은 원래 일부러 흙을 묻혀서 하는 것이라며 무식한 여편네가 헛수고를 했다며 혀를 찼다는 것이다. 너무 심하게 아내의 흉을 보길래 아내 편을 들었던 노인은 그 사람에게 아내보다 더한 악담을 들었다고 한다. 결국 그 사람과 절교했고 노인은 왜 인형에 흙을 묻혀서 판다는 것인지 알아야 분이 풀릴 것 같아 시내 서점에 나가 진시황에 관한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아내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또 봉사 소리를 듣게 할수는 없으니까. 노인은 밤마다 아내에게 읽었던 책 속에서 흥미진진한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어떤 날은 아내가 자는 줄도 모르고 밤새 혼자 중얼중얼 마저 얘기를 끝내기도 했다고. 그러면서 노인은 홍곡지지(鴻鵠之志, 제비나 참새 같은 작은 새가 기러기나 백조의 뜻을 알겠는가)를 키웠다고 한다. 노인의 홍곡지지는 시안과 그 너머 사막을 여행하는 일이다. 다들 비웃었지만 아내만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비로소 작년에 그 소원 하나 못 들어준 게 미안하다며 아내도 같이 가자고 했다. 

 

"작년에 가려고 비행기표까지 끊었는데, 집사람 몸이 다시 나빠지는 바람에…중략…지금까지 내 얘기를 잘 들어주니 고맙고, 마지막으로 잔소리를 한마디 하자면, 어쩌다 이런 구석까지 찾아왔대도 그게 둘이서 걸어온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는 없는 것이라오." -<벚꽃 새해> 중에서-

 

노인의 얘기를 듣고 성진과 정연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떠올린 추억이 하나 있었다. 아유타야를 여행하면서 봤던 부처님 얼굴. 아유타야를 침략한 버마군이 불상들의 목을 자를 때 떨어진 불상의 머리 중 하나를 보리수의 뿌리가 감싸 안았고,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머리는 마치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뿌리와 하나가 된 뿌리 속 부처님 얼굴. 서른에 느끼는 무게감도 마치 오래 전에 거기 있었던 것처럼 개인과 개인이, 개인과 사회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거치는 통과의례 같은 것. 그래서 오늘도 서른 청춘들은 '헛된 시간'(?)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 성진과 정연의 미래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다시 재결합했다거나 각자의 일상에서 멋진 새로운 시작을 했다거나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비록 '헛된 시간'일망정 같은 심정으로 같은 열정으로 같은 길을 걸어가는 서른들이 많다는 것만으로도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는 없는 것이니까.

 

비록 서른을 살아봤지만 그 때의 감상을 여느 작가들처럼 멋지게 들려줄 수는 없다. 다만 서른을 견뎌내는 힘만큼 오늘을 살고 있고 또 서른의 열정으로 내일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서른들이여! 벚꽃 새해에도 외로워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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