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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따따부따

넷상의 여성혐오와 정치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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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레디앙/짤방칼럼 '성재기 대표의 죽음과 여성혐오에 대하여' by 최성용/20대 대학생

 

지난 7월 25일. 이제 고인이 된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의 웹자보가 올라왔다, 시민들의 십시일반을 통한 총 1억 원의 후원을 부탁하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퍼포먼스를 벌이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은 25일 당일에 SNS를 통해 빠른 속도로 넷상에 퍼졌다. 당시에는 설마 그런 퍼포먼스를 하겠는가, 웃긴다, 는 식으로 주로 조롱조의 여론이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다음날 26일 오후, 성재기 대표는 서울 마포대교에서 투신했고 3일 뒤 서강대교 근처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곧 장례가 치러졌고, 그의 발인은 8월 1일에 진행됐다.

 

애초에 성재기 본인이 트위터에 “내일 저녁 7시 사무처 불고기 파티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그래서 7시 이전에 뛰어내린다고 했습니다. 불고기 먹읍시다.”라고 쓴 바 있다.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지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허망하게 죽게 될 거라 믿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건 여론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죽을 거라고 예상됐다면,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찬반의 여부를 떠나 퍼포먼스를 우려하며 말리는 여론이 더 컸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투신은 죽음으로 이어졌고, 그의 투신 퍼포먼스 이후 넷상에서, 특히 SNS 상에서 ‘여성혐오’의 에너지가 강하게 표출되기 시작했다. 명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투신이라는 위험한 퍼포먼스를 계획할 만큼, 남성연대와 성재기 대표에게는 급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물론 남성연대의 7월 30일 성명에도 나와 있듯, 1억 원만이 아니라 이슈 파이팅의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리고 평소 성재기 대표가 여성부의 지원을 받는 수많은 여성단체들과 비교해 남성연대를 ‘약자’라고 주장했던 맥락 속에서, 그의 사망 원인이 여성부로 상징되는 ‘여성 특권’에게로 돌려졌다. 이른바 ‘사회적 타살’이라는 것이다. 이 분노의 흐름은 ‘8월 10일 여성부 폐지 전국민 촛불집회’로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그 수가 얼마나 모일지는 알 수는 없다. 다만 ‘행동과 실천’ 속에서 ‘고난’을 겪다 사망한 성재기 대표의 추모 분위기에 편승해, 인터넷상에서의 여성혐오가 ‘거리에서의 행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될 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우려가 된다.

 

 

글을 쓰기 위해, 필자는 우선 몇몇 지인들에게 물어보았다. 나야 사회운동이나 정치 언저리에 있고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입장이지만, 그런 것에 크게 관심두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주로 왔던 대답은 성재기는 ‘옳은 얘기를 하는 사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고 결국은 ‘여자들이 문제’고 ‘여성부는 없어져야 된다’는 것이었다. 굳이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들 역시 그랬다.

이는 여성혐오가 그저 ‘일베’라는 소수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상당한 대중적 호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SNS상에 급속하게 퍼져가는 여셩혐오의 글들을 보면, 이것이 매우 대중적인 호응을 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야스다 고이치 책 <거리로 나온 넷우익>에서 ‘2011년 8월 21일의 후지TV 항의시위’를 다룬 대목이 떠올랐다. “나는 거기서 재특회(재일조선인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의 배경을 본 것 같았다. 후지TV 반대 시위 참가자들은 돌출된 언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 도착점은 재특회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재특회의 배후에 일반 시민이 대량으로 줄지어 서 있는 것이다.”(야스다 고이치, 2013)

‘이들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이것이 이 글을 쓰는 이유다.

 

성재기 대표의 사망, 그리고 오프라인으로 범람하기 시작한 여성혐오의 흐름. 이를 두고 그저 파시즘이라거나 과대망상·자의식 과잉이라는 식으로 규정해버린다면 필자는 단호하게 반대할 것이다. 이는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이유와 맥락이 존재한다. 원인 없는 결과란 없는 법이다.

 

증오를 성립하기 위해 논리가 만들어지는 경우, 논리가 아니라 그 이면의 감정이라는 맥락이 더욱 중요한 원인이 된다. 그런데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로 대화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순간, 서로가 서로의 맥락을 존중하지 않고 그저 부정의 대상으로만 대하게 된다. 여성혐오가 ‘꼴페미’를 상정하고 발현하는 적대와 증오를, 똑같이 답습하게 되는 모양이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에 두고, 우선 현재 분출되는 여성혐오의 흐름과 그들의 논리 및 세계관을 ‘집단 히스테리 속에서 정당화되는 즉자적 증오’라고 규정하고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파시즘’이라는 식의 규정 대신에 그들이 왜 증오와 분노를 표출하는지, 남성들이 처한 상황과 심리를 논의함으로써 답해보려 한다. 나아가 어떻게 대화하고 소통해야 할지,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정치의 역할’과 ‘사회적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그 방향을 세워볼 것이다.

 

집단 히스테리 속에서 정당화되는 즉자적 증오

 

돌이켜보면 여성부에 대한 공격과 비난은 단순히 성재기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성재기를 ‘영웅’으로 칭하는 것은, 그가 여성부 및 여성들의 특권에 분노하며 ‘최초로’ 그러한 문제를 공적 영역에서 발언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는 역으로 성재기의 죽음 이후 더욱 강하게 표출되는 ‘여성혐오’ 이면에는 상당한 기간 동안 증오와 분노가 축적되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거리로 나온 넷우익>에서 야스다 고이치는 재특회 구성원들이 평범한 사람들이며 그들이 갖고 있는 사회에 대한 분노가 어디에 근거하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다.

 

동시에 그는 재특회의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방식에 대해 ‘저열하다’고 명확하게 못을 박는다. 있지도 않은 특권을 언급하며 ‘공격하기 편한 대상’으로서 사회적 약자인 재일조선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파시즘’을 연상시킨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 사회에서의 ‘유태인’과 같은 존재를 찾아다니고 있는 것일 게다. 소수파라서 공격하기에 부담이 없으면서도, 자본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계급문제를 대체할 수 있는 상징 말이다.”(한윤형, 2013/08/01)

 

문제는 약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합리적 이성’을 가지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증오의 대상을 정하는 순간, 증오하기 위한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파편적인 경험을 가져와 논리를 끼워 맞추면 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증오라는 감정일 따름이다. 이미 증오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아무런 대화도 할 수 없다. 그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대로 증오의 근거가 될 뿐이다.

 

이 막무가내식 증오를 들여다보면 거기엔 왜곡된 세계관, 신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증오’의 주체들은 유태인이든 재일조선인이든 여성이나 호남사람이든 그들이야말로 ‘특권’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를 어지럽히는 주범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증오의 주체인 자신들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인식에서 이를 정당화하고 있다.

 

나는 이를 ‘집단 히스테리 속에서 정당화되는 즉자적 증오’라는 긴 이름으로 규정해보고 싶다. 태초에 문제가 있었을 터이다. 예를 들어 한 여성에게 무시당한 남성이 있었다. 대개 이것이 증오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슷한 예들이 공유되기 시작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여자가 문제야’로 성급한 일반화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짜증과 분노가, 증오와 혐오로 증폭되어 간다.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증오에 동참하며, 그것은 더 큰 증오의 규모와 크기로 발전되어 간다. ‘집단 히스테리’와 같은 심리 상태 속에서 증오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증오는 상징이 될 수 있는 ‘주요 타격대상’을 찾는다. 일본에서 조선학교가 재특회의 타겟이 되었듯, 한국에서는 여성부가 그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런 증오는 매우 ‘즉자적’인 것이다. 태초의 문제에서 남성을 무시한 여성이 있었다면, 그 여성이 문제로 지적된다. 여기서는 개인 대 개인의 문제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공유될 수 있는 경험이라고 한다면, 공유의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일반성’을 띤 문제로 파악하게 된다. 헌데 이러한 과정에는 여성 일반을 문제 삼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이며, 구조가 아닌 행위자에 근본적 원인을 둠으로써 문제를 즉자적으로 이해한다는 한계가 있다.

 

성재기 대표는 과도한 일반화라는 비판에 대해 자신은 ‘여성 일반’이 아니라 ‘꼴페미’와 ‘된장녀’들이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언술에서 이것이 잘 구분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꼴페미’나 ‘된장녀’의 정의 자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편리하게 ‘남성 인권’에 동의하거나 반발하는 경우의 일반을 지칭하는 것 아닌가 싶다. ‘남성인권’에 비판과 반박을 시도하는 모든 이들에게 증오를 퍼부어 줄 태세를 갖추고서 말이다. 증오 대상의 범주가 결국 ‘자기 마음’대로인 거다.

 

그리고 성급한 일반화 이상으로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들의 억울함과 분노의 원인을 ‘구조’가 아닌 여성이라는 ‘행위자’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된장녀’를 문제시한다면 그것은 여성들의 ‘성격’, ‘본성’의 문제인가, 혹은 자본주의적 가치의 내면화가 문제인가. 여성혐오는 전자를 택하고 후자에는 눈을 감는다. 그럼으로써 젠더 비대칭적인 가부장제 하에서 생존을 위해 자본주의적 룰에 따라야하는 ‘보슬아치’의 맥락은, 이해되기보다는 공격의 대상으로 낙인찍힌다.

 

물론 여성부와 여성의 특권이라는 ‘개인’을 넘어선 ‘제도’를 문제의 원인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여성 특권의 문제가 구조적인 것이라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 특권’은 문제시되는 개별 사례들을 사회라는 차원으로 단순 확장한 것이지, 행위 너머의 구조를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들이 느끼는 모순과 분노에 대해 ‘즉자적’으로 그 원인을 찾는 것일 뿐이다. 모순을 더욱 사려 깊게 이해하려는 구조 차원의 전망은 결여된 채.

 

괴로운 남성들, 분노를 표출하다

 

한국사회에서 많은 남성들은 솔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며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런 탓에 자신의 감정표현에 있어 솔직하지 못한 채, 관계나 소통에 있어 거칠고 서투른 경우가 많다.

 

이 사회에서 남성들은 괴롭다. 여성들이 감내해야 하는 잘 보이지 않는 노동과 역할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허나 남성들 역시 스스로의 처지와 감정에 대해서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이 당연히 필요하다.

 

‘시월드’라는 선택지가 없는 남성들은 사회에서 최소한의 성공이라도 얻어내기 위해 발버둥 칠 수밖에 없다. 일단 학벌과 스펙을 쌓아 좋은 직장을 얻어야 한다. 어디 기대기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무한경쟁을 뚫고 성과를 얻어내야 한다. 또한 그 아까운 시간을 군대에서 버려야 한다. 시간도 아깝지만 군대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즐거운 경험이 전혀 아니다. 말로야 군대 괜찮다고 할 수 있어도, 절대 다시 가고 싶은 곳이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통과의례들을 잘 거쳐야만 비로소 ‘남자의 의무’를 다할 수 있다. 최소한 남성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남성들이 ‘억울함’을 느끼고 갈 곳 없는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얼마나 괴롭겠는가. 예컨대 ‘연애 고자’라는 딱지는 그저 자기 외부의 시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스스로의 남성성을 회의하며 ‘정상적 남성’의 규범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해야 한다. 가난한 비정규직들은 자신의 처지로 말미암아 그 억울함이 가득할 것이고, 좋은 학벌에 좋은 직장을 다니는 이들도 자신들이 이룬 성취(와 그를 위해 투입된 노력)에 비해 ‘남성으로서’ 홀대받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애초에 ‘남성’이란 정체성은 ‘여성’이라는 타자와의 규범적인 관계를 달성함으로써 성립할 수 되는 것이니 말이다. 연애나 결혼이라는 여성과의 관계를 획득함으로써 비로소 ‘남자 구실’을 한다고 인정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경쟁과 불평등의 심화에 따라 ‘남자 구실’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리하여 ‘남성’으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그것이 달성되지 않을 경우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오는 억울함과 분노는, 남성이 되기 위한 마지막 통과의례인 ‘여성’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억울함과 분노의 대상이 여성으로 향해지는 것에 나는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여성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게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는데, 얼마나 외로운데, 여자들은 우리를 이해해주기는커녕 자신들이 약자라며 자신들의 권리만 얘기한다… 이런 생각들은 위에서 논한 것처럼 ‘즉자적인 인식’이라는 것에 그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 감정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학벌, 돈, 직장, 외모, 연애…. 온갖 사회적 규범들에 갇혀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언어화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많은 평범한 남성들이 있다. ‘남성다워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이 오히려 남성들을 억압·규율하고, 거기서 남성들은 분노를 느끼지만 그 분노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고자 하는 성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존의 지배적 규범을 강화해나가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다. 솔직하게 맥락을 성찰해내기보다 더욱 공격적이고 폭력적으로, 대화나 교감이 아닌 일방적 증오를 택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인권 담론, 남/여 대립의 프레임

 

좀 더 논의를 진전시켜보면, ‘남성 인권’이라는 말에 내포된 함의를 지적해볼 수 있다. 예컨대 군대 가는 남성의 경우에는 충분히 사회적 약자로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스스로를 약자로 인식하고 언어화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군대라는 공간에서 받아야하는 훈련과, 상하관계에서의 감정적 소모는 충분히 토로하고 공감 받아야 되는 경험이다. 이런 의미에서 ‘남성 인권’을 말하는 것은 스스로의 경험을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언어화하려는 시도라 볼 수 있다.

 

물론 그 언어가 ‘근대국가의 징병제’의 문제를 인식하여 ‘자기 해방’으로 나아가는 성찰의 언어이기보다, 기존의 가부장제 규범을 답습하는 ‘여성혐오’의 맥락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지만 말이다.

 

이 지점에서 ‘남성 인권 담론’은 기존의 가부장제 규범을 따라 남/녀 젠더 이분법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남성 인권 담론은 약자로서 모순 해결의 주체를 남성으로, 모순의 내용을 남성들의 ‘인권’(이라는 개념을 이런 맥락에서 쓰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보지만) 침해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남성 인권’이 침해된다고 느끼는 몇몇 영역들을 사례로 들어, ‘다른 종’인 여성은 그 영역에서 인권을 침해받고 있지 않으므로 불공평하다고 인식한다. 따라서 남성들의 인권침해가 여성들의 특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이 도출된다.

 

이는 분할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군대 가는 남성을 약자라고 규정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남성만 군대 가는 것이 억울하므로 여자도 군대를 가야 한다, 는 주장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여성의 특권이라는 ‘상상된 특권’이 여기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상상된 특권’으로 인한 차별로 현상을 진단하면 거기서 분할지배에 포섭된다. 본질적으로는 징병제라는 근대 국가의 폭력성을 지적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된장녀’가 문제라면 그것은 여자들이 원래 나빠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모순의 표현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남성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남/여 대립의 프레임을 전제한 것으로서 여성을 즉자적인 적대 대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문제의 정확한 구조적 전망을 은폐함으로써 분할지배를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잘못된 원인 분석에 의한 증오와 반대급부의 냉소·공포가 맞물리고 여성혐오는 더욱 심화될 뿐이다.

 

문제는 정치의 실패다

 

‘문제해결’이라는 문제의식 하에서, 필자에겐 현재의 점증하는 여성혐오가 ‘정치의 실패’로 읽힌다. 정치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더 나은 전망을 보여주며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헌데 괴로워하는 많은 남성들의 목소리에 반응해 그들의 경험적 맥락에 천착해 방향을 제시해온 것은, 역설적으로 성재기였다.

 

여성부에 대한 비난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괴담’에 근거해 여성혐오의 상징인 여성부를 공격 하는 것은 넷상에서는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억울함과 분노를 진지하게 듣고 그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아 문제해결을 위해 가장 노력한 것은 다름 아닌 성재기였지 않은가.

 

 

따라서 이는 명백한 정치의 실패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감정과 목소리에 성재기 외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못했고, 사람들의 경험과 괴리된 채 그들에게 설득력 있는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즉자적인 여성혐오를 넘어 남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와 전망은 부재했다. 이는 전적으로 정치의 실패, 혹은 정치의 부재에 그 원인이 있다.

 

여성혐오의 목소리에 대해 그 언어 이면의 감정을 진지하게 들으려 하기 보다는 표층의 언어가 전부라고 대상화하고선 그저 냉소와 무시로 대응해 온 것은 아닌가. 정치라는 공적 영역이 소통을 포기하는 순간, 분노는 편리하고 쉬운 대상으로 향할 뿐이다.

 

그리고 이 즉자적 분노와 ‘전망의 부재’의 바탕에는, 자기 경험과 감정에 대한 성찰의 부재가 깔려있다. 그렇기에 오직 정치만이 제시할 수 있는 ‘올바른 전망’이 요구된다. 사람들에게 전망을 제시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구체적 경험·감정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려 언어화하고 대변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경험을 균형 있게 이해하면서, 격한 감정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을 제시해준다.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으로 전화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단체들이 여성부의 지원을 받는 것과 대비되어 해석되는, ‘1억 원’으로 인한 성재기의 죽음은, 정치적으로 소외되어온 남성들의 억울함을 상징하고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그 ‘정치적 소외’는 단순히 의석수의 남녀비율이 아니라, 남성들의 ‘사적인 것’의 정치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위기는 기회라고 하듯, 현재 심화되는 여성혐오는 그만큼 젠더 이분법의 가부장제가 온전하게 지탱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여성혐오가 지배적 규범을 따르는 방식으로 ‘균열’을 봉합하려 하는 것일지라도, 적극적으로 전망과 메시지를 던지고 설득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성재기의 죽음 이후 분출한 ‘대중적 여성혐오’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진보정치’는 뼈아프게 고민해야 한다. 단순한 대항담론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현재, 갈 곳 잃고 폭주하는 대중적 흐름과 전혀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고민이 필요하다. 비록 거칠고 공격적인 목소리들이더라도, 무시와 냉소가 아니라 그 목소리 안에 담긴 절실함을 읽어내고 ‘소통’하는 것.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소통 속에서 성찰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고, 나아가 사회적 논의 속에서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정치의 역할이고, 그것이 곧 정치다.

 

맺으며

 

필자는 ‘좋은 전망’이란 어느 대단한 연구나 책과 같이 먼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구체적인 경험에 대한 성찰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좋은 정치’ 역시 사람들의 구체적인 경험세계에 바탕해 요구와 전망을 만들어내고, 사회적으로 그 전망을 실현해나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가장 먼저 ‘자신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남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괴로움과 상처를 자신부터 먼저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깊이 바라보고 성찰하며 끌어올린 언어에는, 강력한 ‘공명의 힘’이 있다. 구체적인 경험은 다를지라도, 아픔과 싸우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발버둥 쳐온 이의 언어에는 다른 이들의 아픔마저 감싸는 ‘보편성’이 있다. 하물며 같은 ‘남성’이라면 어떠하겠는가.

 

이 글을 쓰면서 읽었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 우에노 치즈코는 ”남성에게 고유한 성의 아픔과 고뇌가 존재하며” 그렇기에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남성으로 태어나 자랐다는 사실 자체를 완전히 긍정받고 싶다“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책을 끝맺는다.(우에노 치즈코, 2012)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있어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길이었다. 남성에게도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길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여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기혐오’와 싸우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제시하는 것은 더 이상 여성의 역할이 아니다.”(우에노 치즈코, 2012)


 

허접한 글이지만 참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강여호를 만나는 방법은 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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