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그녀의 헌신적 사랑, 그것은 복수였다

반응형

먼 그대/서영은/1983년

 

리비아는 국민소득이 일 인당 1만 달러에 달했으나 인구는 삼백만밖에 되지 않았다. 리비아 정부의 절대 과제 중 하나는 인구를 늘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리비아 정부는 다산을 권장하고 사막 오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시로 끌어내기 위해 갖가지 혜택을 제공했다. 그러나 사막에서 살아온 유목민의 상당수는 그 유혹을 뿌리치고 더 깊이 사막 속으로 들어갔다. 인간은 갈증을 몹시 두려워하지만 그들은 갈증뿐인 사막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 갈증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 리비아에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전설같은 지도가 있었다. 그 지도에는 사막의 땅 속 깊은 곳으로 흐르는 푸른 물길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이 길을 신의 길이라고 불렀고 사막의 오지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들만은 이 푸른 물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고 한다.

 

서영은의 소설 <먼 그대>에 등장하는 이야기 한토막이다. 소설이 1983년에 발표된 점을 미루어 보아 1970년대 내지 1980년대 초의 리비아로 리비아를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이 전하는 형식으로 소개되고 있다. 화려한 도시생활의 유혹을 뿌리치고 갈증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 소설 속 주인공 문자의 삶이 투영된 이야기일 것이다. H 출판사에서 교정일을 보고 있는 문자는 직장 동료들의 따돌림에도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아래서도 나는 살아갈 수 있다'는 절대 긍정적 자신감을 품고 있다. 이 정도 쯤이야 누구나 살아가는 나름의 방법이려니 하겠지만 유부남인 한수에 대한 헌신적 사랑과 아들을 빼앗기면서도 '혈육 역시 초극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그녀의 자기 최면은 섬뜩함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녀의 헌신적 사랑은 다름아닌 복수의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즉 '그가 나에게 준 고통을 나는 철저히 그를 사랑함으로써 복수'하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비를 베풀려고 기다리고 있는 신에게도 나는 멋지게 복수'하겠다는 것이 그녀가 품은 절대 긍정적 자신감의 근원이 되고 있다. 저자는 헌신적 사랑을 가장한 한 여자의 복수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서영은의 소설 <먼 그대>를 읽다보면 중국 작가 루쉰의 소설 <아Q정전>이 떠오른다. 문자의 절대 긍정적 자신감이 아Q의 '정신 승리법'과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정신승리법은 <아Q정전>의 주인공 아Q의 생존방식으로 일종의 자기 합리화를 통한 심리적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루쉰이 아Q와 아Q의 정신승리법을 통해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당시 중국인들의 썩은 근성이었다. 즉 아Q는 동네 깡패들에게 얻어맞고는 '나는 아들한테 맞은 격이다. 아들뻘 되는 녀석과 싸울 필요가 없으니, 나는 정신적으로 이긴 것이다'라고 자위하면서도 힘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당한 정신적·물질적 폭력을 그대로 재연한다는 것이다. 다만 문자의 절대 긍정적 자신감은 아Q의 정신승리법과 달리 철저한 자기 최면이면서 끝까지 감내해야 할 무엇이라는 것이다. 문자에게는 그것만이 사랑하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복수인 셈이다.

 

"고통이여, 어서 나를 찔러라. 너의 무자비한 칼날이 나를 갈가리 찢어도 나느 산다. 다리로 설 수 없으면 몸통이라도, 몸통이 없으면 모가지만으로라도. 지금보다 더한 고통 속에 나를 세워놓더라도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거야. 그가 나에게 준 고통을 나는 철저히 그를 사랑함으로써 복수할 테다. 나는 어디도 가지 않고 이 한자리에서 주어진 그대로를 가지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테야. 그래, 그에게뿐만 아니라 내게 이런 운명을 마련해놓고 내가 못 견디어 신음하면 자비를 베풀려고 기다리고 있는 신에게도 나는 멋지게 복수할 거야!" -<먼 그대> 중에서-

 

한때 사랑해서 아이까지 낳았지만 결국 그녀를 버리고 떠난 남자도 사랑했고, 그 아이마저 뺏어간 남자도 사랑했다. 심지어 끝내 빈털털이가 텁수룩하고 초췌해진 얼굴로 비틀거리며 나타난 남자마저도 그녀는 헌신적으로 사랑했다. 이처럼 완벽한 복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녀의 이런 완벽한 복수의 이면에 숨은 뜻은 제목에서 보듯 '먼 그대', 즉 어떤 절대적 상황이나 절대자에 대한 욕망의 표출이기도 하다.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나에게 결핍된 그 무엇'에 대한 갈망이라는 점에서 절대 긍정적 자신감과 복수로 표출된 '그것에 도달하고픈 열렬한 갈망'은 비루한 삶을 극복하려는 그녀의 생존방식인 것이다. 

 

소설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주인공이 갈등하는 순간마다 등장하는 '낙타'의 상징성이다. 서영은의 또 다른 소설 <사막을 건너는 법>에서 보듯 '사막'은 '절망적 상황'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먼 그대>에서 자주 등장하는 낙타는 그런 상황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문자의 '절대 긍정적 자신감'을 자극하는 그 무엇일 것이다. 낙타가 어떤 동물인가! 풀 한포기 없는 사막에서 혹에 지방을 저장하여 물 없이도 며칠 동안을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 아닌가. 사막이라는 가장 절망적인 환경에서 살지만 자기 안에서 그것을 극복하며 생존할 수 있는 동물이 낙타다. 그녀가 남자에 대한 또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 일어날 때마다 낙타가 등장하는 것도 낙타의 이런 생존방식 때문일 것이다.

 

문자는 이모에게 다시 한 번 더 돈 얘기를 상기시켜야 했다. 이모가 돈을 가지러 방으로 들어간 사이에 문자는 옥조의 사진을 한 번 더 봐두려고 장식장 앞으로 갔다.

'가엾은 자식. 엄마가 네게 지운 짐이 너무 가혹하지? 하지만 너도 네 힘으로 네 속에서 낙타를 끌어내야 한다. 엄마가 너의 삶을 안락한 강변도 있는데 굳이 고통의 늪가에다 던져놓은 이유를 그 낙타가 알게 해줄 거야. 그것이 사랑이란 것을 알게 해줄 거야.' -<먼 그대> 중에서-

 

소설을 읽는 여성 독자들은 내심 불편할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삼종지도(三從之道, 여자가 지켜야 할 세가지 도리)를 연상시키는 문자의 삶이 말이다. 그녀를 버린 남자를 사랑해서 사십을 바라보도록 혼자 사는 것 하며, 둘 사이에 낳은 아들마저 기꺼이 보내주는 것 하며, 결국 인생 패배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 남자마저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답답함을 넘어 분노가 치밀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저자는 주인공의 '절대 긍정적 자신감'이나 '헌신적 사랑'이 나를 버린 남자에 대한 더 나아가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신에 대한 복수라는 점을 밝힘으로써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다. 주인공의 '절대 긍정적 자신감'이나 '헌신적 사랑'은 여전히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당시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동원된 절묘하고 시의적절한 풍자일 것이다.

 

 

반응형